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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명국 시인 / 있으나 마나 한 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3.

김명국 시인 / 있으나 마나 한 담

 

 

볼 테면 언제든지 한번 보슈, 하고

세워놓은 것 같은,

그런데 그 담 너머로 고개 쳐들고

들여다볼 이는 한 사람도 없을 듯

아무리 생각해봐도 있으나 마나 한 담이다

 

없다면 한집인 줄 알까 봐서

그렇게 되면 곤란할 것 같아

세울까 말까 망설이다

금이나 그어놓고 살자 해서 세운 담

 

잠깐 필요해서 빌린 연장인데

그 연장 주인이 다시 찾으러 올 때까지

안 갖다 주고 있다가

능청맞게 내주면서 깜박했다고

씩, 한번 웃어만 줘도 용서가 되는 담

 

가끔은 아무것도 아닌 일 때문에 토라져

싸움도 하고 말도 안 하고 지냈던

무지 불편했던 담

그 집 개도 꽃 보기 싫던 담

하지만 곧 이바지 떡 한 접시로 화해하고 사는 담

 

담 넘어온 감나무 가지에 매달린 감은

가을이면 따먹어도 되는

있으나 마나 한 담

없어도 되는 담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있는 게 나을 것 같아

서로 안 허물고 지내는 담이다

 

-시집 『배불뚝이 항아리 사내가 사는 우리 동네』

 

 


 

 

김명국 시인 / 배불뚝이 항아리 사내가 사는 우리 동네

 

 

비가 내렸다가 금세 그치면

갓 캐온 햇마늘 냄새가 팍 풍겨오는

회를 바른 지 오래된 마당과 보리가 누레질 쯤

뒤란에 서둘러 익은 앵두나무 한 그루 있고

 

겨울이 오면 축사 지붕에 얹힌 눈이 걱정인

엉덩이에 마른 똥이 더덕더덕 달라붙은

주인을 닮은 소가 있다

새끼를 낳은 뒤에 껌벅이는 버릇이 더욱 잦아진

어미의 눈이 있다

 

먼 데 달을 보며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는

갑자기 물어봐서 택호는 잘 생각나지 않아 댈 수 없으나.

틀니를 끼운 이웃집 사투리 구수한 아짐 같은

토종개가 있고

 

빗자루병 걸린 키가 껑충 웃자라 볼썽사나운 대추나무와

연탄도 없던 시절 이야기지만

불 땐다고 곁가지를 조선낫 간짓대 묶은 연장으로 다 잘라가고

우듬지 주변만 조금 남은 빼빼 마른 소나무가 있다

 

그늘 밑 개구리를 잡아먹는다는 뱀이 자주 출몰하는

쥐똥나무와 탱자나무 울타리 안으로

기침이 잦은 병자(病者) 하나가 올해 내년 하면서

날아가다 싸놓은 까치 물찌똥과 함께

페인트칠 벗겨진 대문간에 귀퉁이 닳아버린

문패처럼 걸려 남아 있는 곳

 

한뎃식구들과 낮밥을 먹으면서도

허공에다 자꾸 무언가를 쓰고 있는

논두렁에 풀 벨 낫이나 앉아 갈고 자빠져 있는

의심 많고 조심성 많은 수컷 고라니 같은,

아직 총각이라고 박박 우기는 이웃사촌

배불뚝이 항아리 사내가 사는 우리 동네

 

-시집 『배불뚝이 항아리 사내가 사는 우리 동네』

 

 


 

김명국 시인

1972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 199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베트남 처갓집 방문』(실천문학사, 2014), 『배불뚝이 항아리 사내가 사는 우리 동네』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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