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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다혜 시인 / 혼자 부는 바람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3.

정다혜 시인 / 혼자 부는 바람

 

 

속의 말 한 번 꺼내 보이지 못하고

마지막 인사 없이 헤어진 사람

뜬금없이 생각나는 날

살구꽃 본다

이때쯤이면 져야 하는데, 꽃도

나무도 생각 놓고 살 때가 있는지

살구꽃 아직 붉다

하늘 아래 영원한 것 없다지만

더러는 아물지 않는 상처 있다

그대 어떤 문을 두드려

내 마음 열고 빠져 나갔는지

더는 수신할 수 없는 풍경 때문에

아득하여 만질 수 없는 저 거리

짐짓 모른 척 하지만, 나무는

깊이 뿌리 내리고, 꽃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다만

멀어졌다 혹은 가까워졌다

바람이 저 혼자 왔다 갈 뿐이니

 

 


 

 

정다혜 시인 / 오래된 사랑

 

 

늘 지나던 그 길가에

작은 골동품 가게가

내 발길을 잡았다

늘 지나던 길이었다

그런데 처음 보았다.

 

윈도우에 진열된

오래전부터 내것이었던

지금도 내것인

앞으로도 내것이었으면 좋겠다는

꼭 마음에 드는

화장대 거울앞에

고대 황실의 여왕처럼 앉아

느긋하게 긴 머리를 빗질하고는

퍼프 향수를 허공에 뿌리고

손을 내밀어 천천히 잔향을

코끝으로 당기는 손짓

거울 너머로 보이던

그 남자의 따뜻한 미소

익숙하면서도 낯설은...

 

잠에서 깨듯

흐릿하게 서서히 선명하게 드러나는

세월에 긁힌 상처자국들과

색바랜 사진속의 영혼없는 미소

무관심속에 눈처럼

소복히 쌓여 있는 잿빛 먼지

 

얼마 동안의 시간이었을까

익숙한게 편한거라는 오만함으로

오래된 화장대같은

오래된 내 사랑에게

먼지가 쌓이도록 방치한 세월이...

 

다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랑스런 눈빛으로

아가의 해맑은 미소로

눈처럼 하얀 속살같은 설레이는

카타르시스를

주고 받을 수있을까

 

 


 

정다혜 시인

1955년 대전에서 출생. 2005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그 길 위에 네가 있었다』(드라마, 2005)와 『스피노자의 안경』(고요아침, 2007)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