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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희섭 시인 / 어떤 파종법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3.

이희섭 시인 / 어떤 파종법

 

 

너의 눈빛이 내게로 와서 뿌리를 내린다

마음밭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고 너는 내 안에서 자라난다

너를 경작하는 동안 나의 몸은 너를 향해 열려간다

 

나는 불면이 늘어가고 너는 연민이 늘어간다

오랫동안 발아를 꿈꿔 불온해진 마음 속에서도 살아 움직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너의 생각 뿐

너의 숨결마저 뿌리가 되어 나를 더듬는다

 

너를 온전히 심고 나서야 어둠을 견디는 방식을 알게 될 것이다

오늘 밤에는 사랑 한 뿌리 심어야겠다

 

너의 말이 내게로 와서 상처가 되었다

네 안에 서식하던 말이 날카로운 비수가 된다

나는 가슴이 조여들고 너는 연정이 줄어간다

 

침묵을 내려놓고 이제는 홀로 떠나가야 하는가

나의 슬픈 눈망울에 비친 너의 눈빛이 흔들린다

너의 말을 解毒하기엔 너무 늦었을까

 

내일 밤에는 용서 한 뿌리 심어야겠다

 

 


 

 

이희섭 시인 / 코코넛의 시간

 

 

숲 속에 얼굴이 떨어져 있다

 

작열하는 태양이 나뭇잎을 타고 내려오면

두 개의 눈과 하나의 입이 열매 속에서 자리 잡는다.

나무에서는 수많은 표정이 열리고

바람은 줄기를 타고 열매 속으로 들어간다

 

비는 오래된 슬픔을 길어 올린 눈물처럼

수액으로 흘러들어 나무의 표정을 완성하고 있다

 

새로운 표정을 얻는 것은

감정의 나무가 자라나는 일

 

표정 뒤에 숨겨진 언어를 품고

흰 구름의 표정으로 떨어진 얼굴들

어딘지 태풍의 눈을 닮아 있다

 

눈 속에서 뿌리가 자라난다

 

땅속을 더듬는 눈이 깊은 곳으로부터의 소식을 전하고

입에서는 열정의 시간만큼 온몸으로 싹을 틔운다

 

얼굴이 열리는 나무

표정들이 무성해지는 코코넛의 시간

바닥으로 얼굴들이 모여들었다

 

 


 

이희섭 시인

경기 김포 출생. 건국대 행정대학원 석사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수료. 2006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스타카토』 『초록방정식』이 있음. 한국작가회의 회원. 현재 중부지방국세청에 재직중. <시우주> 회장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