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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동범 시인 / 정오의 기차역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3.

조동범 시인 / 정오의 기차역

 

 

 폭력처럼 기차가 달려온다. 누군가는 아무렇게나 버려진 종이처럼 무너지기 시작하고, 두꺼비 떼는 철길을 횡단하고 있다. 철로 변의 슬픔 몇 포기가 폭염을 읽고 있는 오후는 그러나 애서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고백하건데 세계는 쓸모없는 것들로 가득하구나. 그리하여 추문을 공시하는 것은, 날아오르는 비둘기 떼가 아니라고 누군가 증얼거리기 시작한다. 텅 빈 승강장마다 돌이킬 수 없는 두려움은 서성이지만, 이토록 화창한 정오의 순간이므로, 기차역의 계단을 오르는 것이 불안과 공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불길함은, 두근거리며 달려오는 기차처럼 어느덧 이곳에 당도할 것이다. 두꺼비 떼는 철길을 횡단하며 문득 뒤를 볼지도 모른다. 태양은 이제 점점 지상을 향해 기울 것이다. 쿵쾅거리는 심박에 맞춰 정오는 찬란하고, 나무마다 매달린 죽은 자의 음성은, 두근거리는 기차처럼 맹렬한 오후가 되어갈 것이다.

<시와 사상 2016년 겨울호>

 

 


 

 

조동범 시인 / Vacation

 

 

 그것은 등화관제 훈련의 숨죽인 어둠입니까. 아니면 민방위 훈련의 텅 빈 거리입니까. 불빛이 새어나가면 창문마다 흐느낌은 시작 됩니다. 사이렌이 울려 퍼질 때 기원을 알 수 없는 식물들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고, 여름밤의 풀벌레는 비로소 평화로운 전원이 되어갑니다.

 

 그것은 마치 워터파크의 밤을 배회하는 익사체처럼, 기이하고 불온한 순간들을 호명합니다. 민방위 훈련의 공습경보가 울리는 순간마다, 태어날 수 없는 아이들은 모든 무덤들의 연원을 궁금해하기로 합니다. 그러나 라디오의 채널들이 금지된 서사를 전송하는 순간에도 대관람차의 연인들은 그저

 

 키스를 거듭할 뿐입니다. 공습경보의 끝에는 그렇고 그런 신파만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등화관제의 캄캄한 밤은 무덤도 없이 사라진 누군가를 허밍할 뿐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리운 밤에는 부리도 없이, 날개도 없이,

 

 지쳐버린 철새떼는 해안선을 따라 고요하게 출렁입니다. 태어나지 않을 아이들이 배회하는 해안선으로부터, 끝나지 않는 울음들은 융기를 거듭하고, 저녁은 이윽고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순간처럼 물러갑니다. 휴양지로 향하던 고속버스가 불길에 휩싸이면

 

 태어나지 않을 아이들의 해변은 잊을 수 없는 서사를 이윽고 완성합니다. 그것은 난파당한 배들의 잊을 수 없는 항로입니까. 아니면 무덤도 없이 펼쳐지는 누군가의 이야기입니까. 바다가 차오를 때, 그곳으로부터 죽은 자들의 음성은 흘러나옵니까. 그리하여

 

 그것은 등화관제 훈련의 숨죽인 어둠입니까. 아니면 민방위 훈련의 텅 빈 거리입니까.

 

 


 

조동범 시인

1970년 경기도 안양에서 출생. 서울예대. 한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2002년 《문학동네》신인상을 통해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카니발』, 『금욕적인 사창가』와 산문집 『나는 속도에 탐닉한다』, 평론집 『디아스포라의 고백들』, 등을 펴냄. 딩아돌하작품상, 미네르바작품상, 김춘수시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경희사이버대, 서울예대, 중앙대, 한경대 등에 출강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