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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천수호 시인 / 폭로(暴露)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3.

천수호 시인 / 폭로(暴露)

 

 

여성의 해부학적 구조를 닮은 저 폭포,

아우라지강으로 통하는 오장폭포에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는다

폭로(瀑路) 되었다

 

돌이킬 수 없는 말들이 쏟아진

아픈 귀와 시끄러운 입에서

그 바닥이 드러난다

 

말이 지나갈 때

혀도 함께 허물을 벗었다는 소문

 

거미줄을 걷어낸다

 

좁아터진 저 수로에

폭력과 협력과 괴력이 함께 다 지나가버린

울컥한 잠적

 

건조해진 주름살로 꺼이꺼이 허스키 울음만 우는,

늙은 과부의 후두처럼 할 말을 멈춘,

폭로(瀑路)가 활짝 열려있다.

 

 


 

 

천수호 시인 / 내가 아버지의 첫사랑이었을 때

 

 

아버지는 다섯 딸 중

나를 먼저 지우셨다

 

아버지께 나는 이름도 못 익힌 산열매

 

대충 보고 지나칠 때도 있었고

아주 유심히 들여다 볼 때도 있었다

 

지나칠 때보다

유심히 눌러볼 때 더 붉은 피가 났다

 

씨가 굵은 열매처럼 허연 고름을 불룩 터뜨리며

아버지보다 내가 곱절 아팠다

 

아버지의 실실한 미소는 행복해 보였지만

아버지의 파란 동공 속에서 나는 파르르 떠는 첫 연인

 

내게 전에 없이 따뜻한 손 내밀며

당신, 이제 당신 집으로 돌아가요, 라고 짧게 결별을 알릴 때

 

나는 가장 쓸쓸한 애인이 되어

 

내가 딸이었을 때의 미소를 버리고

아버지 연인이었던 눈길로

 

아버지 마지막 손을 놓는다

 

 


 

 

천수호 시인 / 송도

 

 

검은 배를 한 짝 씩 신고 대양으로 미끄러져 나간다

누굴까? 저 큰 발의 임자는!

아버지가 그 옛날 신었다는 검정고무신에

가끔씩 하얀 꽃그림을 그려 넣는 언니가 있었다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언니의 매화는 천천히 떨어졌다

회색 바다 위에 검정고무신이 흩어진다

어디를 디뎌야 아버지 화가 풀릴까

언니는 검정치마 뒤로 흰 붓을 숨겼다

알 수 없는 무늬가 엉덩짝에 어룽거렸지만

언니는 혼자만 몰랐다

아궁이에 젓가락을 달궈 머리카락에 웨이브를 넣고

분꽃씨 쪼개어 실핏줄 붉은 볼에 비벼댈 때마다

두 눈 부릅뜨던 아버지

검정고무신을 꽃신으로 만들던 언니는

꽃신의 매화가 다 진 줄도 모르고

아버지가 늦게 용서한 줄도 모르고

흰 무명천을 매화 봉오리처럼 휘휘 감고 숨었다

아버지의 고무신 보폭도 줄어들어

겹겹의 꽃잎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듯 천천히 멈췄다

그 꽃잎이 다시 겹겹 수십 번 새로 피고

바다 얘기는 점점 더 까마득해졌다

기일만 되면 키 큰 아버지는

저 너른 바다 위에 검정고무신을 흩여놓고

이제는 제법 나이 들어 처연하게 분꽃씨 빻는

언니를 내려다보고나 있는 듯이

참 나른하게 화창한 날씨를 내다 걸었다

 

 


 

 

천수호 시인 / 의혹

 

 

겨울 밭둑에

눈 홉뜬 구멍 하나 있다

 

어디로 꺾였는지 꼬리만 간당거리는 어둠

 

쥐 한 마리 거뜬 드나들 것같이

제법 솔깃한 구멍

 

긴장한 저 목구멍에서

딸꾹질 튀어오를지도 몰라

 

불쑥 내뱉는 욕설처럼

긴 혀가 굴러나올지도 모르지

 

귀를 갖다대면

더 쫑긋해진 귀가 다가오고

 

눈을 갖다대면

까만 눈동자를 굴리는 구멍

 

궁금해질수록 어둠은 더 팽팽해져서

먹창호지 부욱 찢으며

손가락 하나 나올 듯도 한데

 

벌렸다 오므렸다

안과 밖, 저 소통의 괄약근

 

어둠은 제 배설물을 다시

꾸역꾸역 밀어넣고 있다

 

 


 

 

천수호 시인 / 하룻밤의 고독

 

 

어둠 속 롤러코스터

어디에 앉아도 위태롭다

 

전신을 파악 죄고는

호두 껍데기처럼 멋대로 쪼개지는 밤

허공 딛는 발소리만

하늘을 송두리째 삼켜버렸다

 

은빛 목걸이로 반짝이는 유원지의 밤과

굴 껍질 섞인 엘리엇의 밤이 교차했다

 

불룩한 배를 쓰다듬는 아메리카의 그녀와

저주를 떠맡은 결백한 메피스토펠레스*는

하늘도 물리고 땅도 밀어낸 귀머거리가 아니었다

 

휘젓는 비명 소리

고막이 쩡쩡 갈라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거대한 밤의 마차가

고대를 건너 중세를 밟고 근대를 지나

21세기의 대지를 한 바퀴 쓸고 지나갔을 것이다

 

*프랑코 모레티의 「근대의 서사시」에서 인용.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를 유혹의 폭력으로부터, 시리제로는 모든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준다. 모레티는 이것을 괴테의 탁월한 발견, 결백의 수사학이라고 한다.

 

 


 

 

천수호 시인 / 새소리 마을

 

 

 새소리로 소통하는 마을이 있다 새소리로 이웃을 부르고 새소리로 심부름 시키는 산촌 마을, 새와 사람이 함께 지저귀는 마을이다 새소리에 기댄 사람들은 너무 멀리서 서로를 불렀다 언덕에서 부르면 골짜기에서 대답했다 윗 마을에서 날아오른 지저귐이 아랫마을에 닿으면 때론 춤이 되고 때로는 노래가 되었다 흥이 난 아이들은 길을 계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새소리로 소통하기엔 마을인 너무 가까워졌다 소리 대신 손을 먼저 내밀게 된 아이들은 점점 새소리를 잊어갔다 서로에게 춤을 권할 줄도 노래를 권할 줄도 몰랐다 새가 지저귀는지 어른들이 부르는지 분간하지 못했다 어른들은 궁여지책, 새소리 학교를 열었다. 새소리로 웃고 새소리로 울게 했다 마침내 이 마을엔 온통 새소리뿐이다 소리만 남겨두고 정작, 새는 날아가버렸다

 

 


 

 

천수호 시인 / 개꿈

 

 

매일 밤 꿈을 꾸지만

꿈속에선 개가 아니어서 꿈 밖으로 끌려나오진 않았다

그렇다고 영원히 꿈속에 살 거라 버팅기지도 않았기에

개의 사생활은 발자국을 찍어봐야 아는 것이었다

 

눈 덮인 길이거나 모래밭 길이 아니면

내가 개라는 근거도 없지만

내가 짖는 소리에 내가 놀라면서

발소리를 더 빠르게 내는 뜀박질의 나날들

 

눈과 입이 다르게 웃는 사진이

목끈 매인 개처럼 문 앞에 걸려 있다

사진관의 문지기 사진처럼 누가 들락거리는 것을 막지도 못할

심약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꿈속에서 왈왈 짖던 말티즈 한 마리가

꿈 밖에서 사람 걸음을 걷는 놀라운 목격담 같은 것은

소용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슬퍼서 귀를 막고 천둥처럼 혀를 찼다

 

개는 소리를 믿고 소리를 향해 짖지만

꿈속의 나는 소리를 의심하면서 더 깊이 침묵하고 싶어졌다

개가 아닌 몸으로 꿈속을 더듬다가

개로 돌아가는 방법을 잊었다

 

 


 

천수호 시인

1964년 경북 경산에서 출생. 대구 계명대 문에창작학과 졸업. 명지대학교 박사과정.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명지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졸업. 시집으로 『아주 붉은현기증』(민음사, 2009)과 『우울은 허밍』(문학동네, 2014)이 있음.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현재 명지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