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호 시인 / 폭로(暴露)
여성의 해부학적 구조를 닮은 저 폭포, 아우라지강으로 통하는 오장폭포에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는다 폭로(瀑路) 되었다
돌이킬 수 없는 말들이 쏟아진 아픈 귀와 시끄러운 입에서 그 바닥이 드러난다
말이 지나갈 때 혀도 함께 허물을 벗었다는 소문
거미줄을 걷어낸다
좁아터진 저 수로에 폭력과 협력과 괴력이 함께 다 지나가버린 울컥한 잠적
건조해진 주름살로 꺼이꺼이 허스키 울음만 우는, 늙은 과부의 후두처럼 할 말을 멈춘, 폭로(瀑路)가 활짝 열려있다.
천수호 시인 / 내가 아버지의 첫사랑이었을 때
아버지는 다섯 딸 중 나를 먼저 지우셨다
아버지께 나는 이름도 못 익힌 산열매
대충 보고 지나칠 때도 있었고 아주 유심히 들여다 볼 때도 있었다
지나칠 때보다 유심히 눌러볼 때 더 붉은 피가 났다
씨가 굵은 열매처럼 허연 고름을 불룩 터뜨리며 아버지보다 내가 곱절 아팠다
아버지의 실실한 미소는 행복해 보였지만 아버지의 파란 동공 속에서 나는 파르르 떠는 첫 연인
내게 전에 없이 따뜻한 손 내밀며 당신, 이제 당신 집으로 돌아가요, 라고 짧게 결별을 알릴 때
나는 가장 쓸쓸한 애인이 되어
내가 딸이었을 때의 미소를 버리고 아버지 연인이었던 눈길로
아버지 마지막 손을 놓는다
천수호 시인 / 송도
검은 배를 한 짝 씩 신고 대양으로 미끄러져 나간다 누굴까? 저 큰 발의 임자는! 아버지가 그 옛날 신었다는 검정고무신에 가끔씩 하얀 꽃그림을 그려 넣는 언니가 있었다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언니의 매화는 천천히 떨어졌다 회색 바다 위에 검정고무신이 흩어진다 어디를 디뎌야 아버지 화가 풀릴까 언니는 검정치마 뒤로 흰 붓을 숨겼다 알 수 없는 무늬가 엉덩짝에 어룽거렸지만 언니는 혼자만 몰랐다 아궁이에 젓가락을 달궈 머리카락에 웨이브를 넣고 분꽃씨 쪼개어 실핏줄 붉은 볼에 비벼댈 때마다 두 눈 부릅뜨던 아버지 검정고무신을 꽃신으로 만들던 언니는 꽃신의 매화가 다 진 줄도 모르고 아버지가 늦게 용서한 줄도 모르고 흰 무명천을 매화 봉오리처럼 휘휘 감고 숨었다 아버지의 고무신 보폭도 줄어들어 겹겹의 꽃잎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듯 천천히 멈췄다 그 꽃잎이 다시 겹겹 수십 번 새로 피고 바다 얘기는 점점 더 까마득해졌다 기일만 되면 키 큰 아버지는 저 너른 바다 위에 검정고무신을 흩여놓고 이제는 제법 나이 들어 처연하게 분꽃씨 빻는 언니를 내려다보고나 있는 듯이 참 나른하게 화창한 날씨를 내다 걸었다
천수호 시인 / 의혹
겨울 밭둑에 눈 홉뜬 구멍 하나 있다
어디로 꺾였는지 꼬리만 간당거리는 어둠
쥐 한 마리 거뜬 드나들 것같이 제법 솔깃한 구멍
긴장한 저 목구멍에서 딸꾹질 튀어오를지도 몰라
불쑥 내뱉는 욕설처럼 긴 혀가 굴러나올지도 모르지
귀를 갖다대면 더 쫑긋해진 귀가 다가오고
눈을 갖다대면 까만 눈동자를 굴리는 구멍
궁금해질수록 어둠은 더 팽팽해져서 먹창호지 부욱 찢으며 손가락 하나 나올 듯도 한데
벌렸다 오므렸다 안과 밖, 저 소통의 괄약근
어둠은 제 배설물을 다시 꾸역꾸역 밀어넣고 있다
천수호 시인 / 하룻밤의 고독
어둠 속 롤러코스터 어디에 앉아도 위태롭다
전신을 파악 죄고는 호두 껍데기처럼 멋대로 쪼개지는 밤 허공 딛는 발소리만 하늘을 송두리째 삼켜버렸다
은빛 목걸이로 반짝이는 유원지의 밤과 굴 껍질 섞인 엘리엇의 밤이 교차했다
불룩한 배를 쓰다듬는 아메리카의 그녀와 저주를 떠맡은 결백한 메피스토펠레스*는 하늘도 물리고 땅도 밀어낸 귀머거리가 아니었다
휘젓는 비명 소리 고막이 쩡쩡 갈라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거대한 밤의 마차가 고대를 건너 중세를 밟고 근대를 지나 21세기의 대지를 한 바퀴 쓸고 지나갔을 것이다
*프랑코 모레티의 「근대의 서사시」에서 인용.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를 유혹의 폭력으로부터, 시리제로는 모든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준다. 모레티는 이것을 괴테의 탁월한 발견, 결백의 수사학이라고 한다.
천수호 시인 / 새소리 마을
새소리로 소통하는 마을이 있다 새소리로 이웃을 부르고 새소리로 심부름 시키는 산촌 마을, 새와 사람이 함께 지저귀는 마을이다 새소리에 기댄 사람들은 너무 멀리서 서로를 불렀다 언덕에서 부르면 골짜기에서 대답했다 윗 마을에서 날아오른 지저귐이 아랫마을에 닿으면 때론 춤이 되고 때로는 노래가 되었다 흥이 난 아이들은 길을 계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새소리로 소통하기엔 마을인 너무 가까워졌다 소리 대신 손을 먼저 내밀게 된 아이들은 점점 새소리를 잊어갔다 서로에게 춤을 권할 줄도 노래를 권할 줄도 몰랐다 새가 지저귀는지 어른들이 부르는지 분간하지 못했다 어른들은 궁여지책, 새소리 학교를 열었다. 새소리로 웃고 새소리로 울게 했다 마침내 이 마을엔 온통 새소리뿐이다 소리만 남겨두고 정작, 새는 날아가버렸다
천수호 시인 / 개꿈
매일 밤 꿈을 꾸지만 꿈속에선 개가 아니어서 꿈 밖으로 끌려나오진 않았다 그렇다고 영원히 꿈속에 살 거라 버팅기지도 않았기에 개의 사생활은 발자국을 찍어봐야 아는 것이었다
눈 덮인 길이거나 모래밭 길이 아니면 내가 개라는 근거도 없지만 내가 짖는 소리에 내가 놀라면서 발소리를 더 빠르게 내는 뜀박질의 나날들
눈과 입이 다르게 웃는 사진이 목끈 매인 개처럼 문 앞에 걸려 있다 사진관의 문지기 사진처럼 누가 들락거리는 것을 막지도 못할 심약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꿈속에서 왈왈 짖던 말티즈 한 마리가 꿈 밖에서 사람 걸음을 걷는 놀라운 목격담 같은 것은 소용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슬퍼서 귀를 막고 천둥처럼 혀를 찼다
개는 소리를 믿고 소리를 향해 짖지만 꿈속의 나는 소리를 의심하면서 더 깊이 침묵하고 싶어졌다 개가 아닌 몸으로 꿈속을 더듬다가 개로 돌아가는 방법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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