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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임희구 시인 / 곱창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3.

임희구 시인 / 곱창

 

 

흰눈이 팡 팡 팡 쏟아지는 밤

양철 깔대기에

능글능글한 돼지창자를 까뒤집어 놓고

썩은 똥찌꺼기를 훑어낸다

돼지똥을 만진다

라디오에선 주의 탄일을 축하 축하하고

고무통 속 찬물에 담긴 돼지창자에선

죽어 나자빠질 똥냄새가 퍼진다

모락모락 퍼진다

진동한다

손가락이 얼어터져

손가락이 똥이 될 것만 같다

찜통 속 펄 펄 펄 끓는 물이

똥 뺀 창자를 기다린다

얼어터지다 불 속으로 들어가는

기가 막힌 돼지창자의

싯누런 똥냄새 울려 퍼지는

즐거운 메리 크리스마스

 

 


 

 

임희구 시인 / 삿갓번지 4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깊은 밤 이삿짐을 꾸렸다

가슴 속의 피와 살 다 까맣게 타버렸을 어머니

 

계절마다 낯선 동네들을 떠다녔다

박순태 씨댁 영철이네 용금이네 백칠 번지 백팔 번지

한일이네 김천사 복덕방집 하정이네 선영이네

오백이십칠 번지 재술이네 남서울교회 창고방

공릉동 옥탑방……

허기진 뱃속에서 아버지보다 더 오래 산 지독한 암세포

 

생각나지 않는 아버지

 

 


 

 

임희구 시인 / 우울한 연애 1

 

 

참치찌개를 끓이려는데

김치가 없다 양파도 없고 두부도 없다

있는 거라곤 달랑 오이 두 개

오이만으로 참치찌개를 끓일 수 있나

 

참치찌개를 포기하고

오이 한 개 채 썰어서 밥을 비빈다

다른 야채가 곁들여지지 않은 오이밥

 

처음

몇 숟가락은 푸른 맛에 끌려

배고픈 맘 달래며 먹어보지만

오래 못 먹는다

 

오이만으로

비빔밥이 될 수 없음을

깨닫는

김치없는 밤, 쓸쓸한 밥

 

 


 

 

임희구 시인 / 찬밥

 

 

온종일 밥그릇이나 가마솥에서 사람들의 따뜻한

위장 속으로 들어갈 때를 기다리다 지쳐 굳은살

박이던 그 시절, 귀엽게 사랑 받던 그때야 늘

내가 당당한 끼니로 군림했었지

 

그놈의 전기밥통이 생겨난 뒤론 솔솔 김 오르는

뜨거운 밥에 밀려, 외국에서 불러온 인스턴트 식품에

눌려 나 같은 찬밥이야 팩 찌그러지니 보기 힘든

구석퉁이 외딴집에서나 옛 자취를 찾을까

 

날 사랑해줄 사람 없구나 애새끼 하나 없구나

정답게 밥상에 올라 된장 찍은 풋고추와 함께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감칠맛 나는 날들을 사라지고

그렇게 다 사라지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어디에도 내가 몸 붙일 곳은 없어

간혹 손님 없는 식당에서 볶음밥이 되려고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 그것은 내가 아니야 숨막히는

전기밥통 속에서 쉴 틈 없이 열받다가 가끔 변질되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면 그때야 찬밥이 되지

 

썩은 찬밥이 되지

내 설자리가 없는 지금은 첨단 공화국

그대들도 언젠가 파묻혀갈,

 

 


 

임희구 시인

1965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와 방통대 국문과 졸업. 《생각과 느낌》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시집으로 『걸레와 찬밥』(시평사, 2004)와 『소주 한 병이 공짜』(문학의 전당, 2011) 등이 있음. 2003년 제12회 전태일 문학상 수상. 2007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진흥기금 수혜. 현재 독거노인과 함께 사랑나누기 '걸레와찬밥'을 운영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