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구 시인 / 곱창
흰눈이 팡 팡 팡 쏟아지는 밤 양철 깔대기에 능글능글한 돼지창자를 까뒤집어 놓고 썩은 똥찌꺼기를 훑어낸다 돼지똥을 만진다 라디오에선 주의 탄일을 축하 축하하고 고무통 속 찬물에 담긴 돼지창자에선 죽어 나자빠질 똥냄새가 퍼진다 모락모락 퍼진다 진동한다 손가락이 얼어터져 손가락이 똥이 될 것만 같다 찜통 속 펄 펄 펄 끓는 물이 똥 뺀 창자를 기다린다 얼어터지다 불 속으로 들어가는 기가 막힌 돼지창자의 싯누런 똥냄새 울려 퍼지는 즐거운 메리 크리스마스
임희구 시인 / 삿갓번지 4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깊은 밤 이삿짐을 꾸렸다 가슴 속의 피와 살 다 까맣게 타버렸을 어머니
계절마다 낯선 동네들을 떠다녔다 박순태 씨댁 영철이네 용금이네 백칠 번지 백팔 번지 한일이네 김천사 복덕방집 하정이네 선영이네 오백이십칠 번지 재술이네 남서울교회 창고방 공릉동 옥탑방…… 허기진 뱃속에서 아버지보다 더 오래 산 지독한 암세포
생각나지 않는 아버지
임희구 시인 / 우울한 연애 1
참치찌개를 끓이려는데 김치가 없다 양파도 없고 두부도 없다 있는 거라곤 달랑 오이 두 개 오이만으로 참치찌개를 끓일 수 있나
참치찌개를 포기하고 오이 한 개 채 썰어서 밥을 비빈다 다른 야채가 곁들여지지 않은 오이밥
처음 몇 숟가락은 푸른 맛에 끌려 배고픈 맘 달래며 먹어보지만 오래 못 먹는다
오이만으로 비빔밥이 될 수 없음을 깨닫는 김치없는 밤, 쓸쓸한 밥
임희구 시인 / 찬밥
온종일 밥그릇이나 가마솥에서 사람들의 따뜻한 위장 속으로 들어갈 때를 기다리다 지쳐 굳은살 박이던 그 시절, 귀엽게 사랑 받던 그때야 늘 내가 당당한 끼니로 군림했었지
그놈의 전기밥통이 생겨난 뒤론 솔솔 김 오르는 뜨거운 밥에 밀려, 외국에서 불러온 인스턴트 식품에 눌려 나 같은 찬밥이야 팩 찌그러지니 보기 힘든 구석퉁이 외딴집에서나 옛 자취를 찾을까
날 사랑해줄 사람 없구나 애새끼 하나 없구나 정답게 밥상에 올라 된장 찍은 풋고추와 함께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감칠맛 나는 날들을 사라지고 그렇게 다 사라지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어디에도 내가 몸 붙일 곳은 없어 간혹 손님 없는 식당에서 볶음밥이 되려고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 그것은 내가 아니야 숨막히는 전기밥통 속에서 쉴 틈 없이 열받다가 가끔 변질되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면 그때야 찬밥이 되지
썩은 찬밥이 되지 내 설자리가 없는 지금은 첨단 공화국 그대들도 언젠가 파묻혀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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