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국 시인 / 있으나 마나 한 담
볼 테면 언제든지 한번 보슈, 하고 세워놓은 것 같은, 그런데 그 담 너머로 고개 쳐들고 들여다볼 이는 한 사람도 없을 듯 아무리 생각해봐도 있으나 마나 한 담이다
없다면 한집인 줄 알까 봐서 그렇게 되면 곤란할 것 같아 세울까 말까 망설이다 금이나 그어놓고 살자 해서 세운 담
잠깐 필요해서 빌린 연장인데 그 연장 주인이 다시 찾으러 올 때까지 안 갖다 주고 있다가 능청맞게 내주면서 깜박했다고 씩, 한번 웃어만 줘도 용서가 되는 담
가끔은 아무것도 아닌 일 때문에 토라져 싸움도 하고 말도 안 하고 지냈던 무지 불편했던 담 그 집 개도 꽃 보기 싫던 담 하지만 곧 이바지 떡 한 접시로 화해하고 사는 담
담 넘어온 감나무 가지에 매달린 감은 가을이면 따먹어도 되는 있으나 마나 한 담 없어도 되는 담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있는 게 나을 것 같아 서로 안 허물고 지내는 담이다
-시집 『배불뚝이 항아리 사내가 사는 우리 동네』
김명국 시인 / 배불뚝이 항아리 사내가 사는 우리 동네
비가 내렸다가 금세 그치면 갓 캐온 햇마늘 냄새가 팍 풍겨오는 회를 바른 지 오래된 마당과 보리가 누레질 쯤 뒤란에 서둘러 익은 앵두나무 한 그루 있고
겨울이 오면 축사 지붕에 얹힌 눈이 걱정인 엉덩이에 마른 똥이 더덕더덕 달라붙은 주인을 닮은 소가 있다 새끼를 낳은 뒤에 껌벅이는 버릇이 더욱 잦아진 어미의 눈이 있다
먼 데 달을 보며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는 갑자기 물어봐서 택호는 잘 생각나지 않아 댈 수 없으나. 틀니를 끼운 이웃집 사투리 구수한 아짐 같은 토종개가 있고
빗자루병 걸린 키가 껑충 웃자라 볼썽사나운 대추나무와 연탄도 없던 시절 이야기지만 불 땐다고 곁가지를 조선낫 간짓대 묶은 연장으로 다 잘라가고 우듬지 주변만 조금 남은 빼빼 마른 소나무가 있다
그늘 밑 개구리를 잡아먹는다는 뱀이 자주 출몰하는 쥐똥나무와 탱자나무 울타리 안으로 기침이 잦은 병자(病者) 하나가 올해 내년 하면서 날아가다 싸놓은 까치 물찌똥과 함께 페인트칠 벗겨진 대문간에 귀퉁이 닳아버린 문패처럼 걸려 남아 있는 곳
한뎃식구들과 낮밥을 먹으면서도 허공에다 자꾸 무언가를 쓰고 있는 논두렁에 풀 벨 낫이나 앉아 갈고 자빠져 있는 의심 많고 조심성 많은 수컷 고라니 같은, 아직 총각이라고 박박 우기는 이웃사촌 배불뚝이 항아리 사내가 사는 우리 동네
-시집 『배불뚝이 항아리 사내가 사는 우리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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