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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해돈 시인 / 바퀴의 묵언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7.

최해돈 시인 / 바퀴의 묵언

 

 

아파트 주차장

꿈적 않는 승용차 바퀴

 

그가 찐빵처럼 따끈한 휴식을 하고 있다

그가 먼 길을 가려고 몸을 풀고 있다

그가 새로운 땅을 밟기 위해 어둠을 견디고 있다

그가 지나가는 사람의 굽은 등을 본다

그의 침묵이 적막에 차츰, 빨려든다

 

먼 길을 달리며 외로움에 푹, 젖은 일상들

눕지 못하고 온종일 서서 차의 무게를 견디는 힘겨운 시간들

불쌍하다

순간, 그의 몸에 긁힌 깊은 상처가 되고 싶다

 

그를 자세히 보니

 

나도 자유의 바퀴가 되고 싶은

나도 자유의 바퀴가 되어 실컷 달리며 울고 싶은

나도 자유의 바퀴가 되어

길 끝 어디론가 힘차게 굴러가고 싶은, 이 마음

 

바퀴가, 저 불쌍한 바퀴가

 

내일의 푸른 먼지가 되려고 잠을 이루지 못한다. 어둠에게 뜨거운 여름을 잘 건너 왔다. 말하려고 눈을 깜빡인다. 둥그런 울타리가 되려고 직선과 곡선을 계속 긋고 있다

 

바퀴는 어디서 나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바퀴가 가는 길, 그 길 끝이 있기는 한 걸까

 

나는 바퀴를 보며 더는 바퀴가 되지 못하고, 더는 바퀴의 옆이 되지 못한다. 아니, 나는 이미 바퀴가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바퀴가 되어 바퀴의 출처가 다소 궁금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 바퀴가 되어 바퀴의 옆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팽팽하고

 

기억의 잔뿌리와 흔들리는 모든 것들이 시간을 다투어 밤의 터널을 막 지나갈 때

 

아파트 주차장 어둠에 묻혀 있는 저 바퀴의 묵언, 묵언은

 

 


 

 

최해돈 시인 / 일요일의 문장들

 

 

미풍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떨림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담벼락에 사는 벽돌의 나이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걸어모는 봄의 머리카락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 행렬의 속도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적색 신호등이 살아있는 시간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온종일 비행하는 먼지의 행방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쓸쓸히 멀어져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까만 볼펜 뚜껑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주고받은 언어들의 동그란 모양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굴러가다 멈춘 바퀴들의 그늘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도서관 2층과 3층 사이, 계단의 묵언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방으로 들어오는 빛의 따스함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여백을 채우는 사각 유리창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시집 속에 누운 바탕체 작은 글씨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쉼 없이 부는 바람의 성실함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플라스틱 의자의 간절한 기다림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먼 길을 동행하는 어머니의 거친 손등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서랍 속에서 잠자는 어둠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평행으로 흐르는 시간의 고마움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허공에도 무늬가 있다는 신뢰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종이컵에 떨어지는 탱탱한 물방울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바깥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운동화 끈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신문에 박혀있는 소설가의 흑백 사진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푸른 저녁으로 지친 나를 데리고 가는 안경테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말없이 기울어가는 계절의 안타까움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일요일이 일요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최해돈 시인 /

 

 

뼈가, 바깥을 품는 뼈가 되는 데에는

뼈가. 좀 더 안쪽으로 파고드는 튼실한 뼈가 되는 데에는

 

별들도 불면의 아픔을 여러 번 견뎌야 했다

 

뼈는 태어나자마자

뼈가 되고자

처음, 물방울을 보았다

 

뼈가, 하나의 뼈가 되는 사이

 

정직한 계절은 자주 외출을 했고

텅 빈 가을날에 편서풍은 꽤 불었으며

건널목 옆, 온종일 서 있는 어린 은행나무는

나이를 자꾸 먹어 어른으로 성장했다

 

, 그는

 

외로움을 잘 견딜 줄 아는 한 묶음의 고요였다

기쁨과 슬픔을 잘 비비는 데 필요한 빈 그릇이었다

더는 가난하지 않은 먼 종소리였다

 

나는 새로운 뼈가 되고자 아침을 맞는다

당신은 새로운 뼈가 되고자 아침을 맞는다

 

당신과 나는

 

, 뼈가 되고자

흔들리며 휘어지며 차츰 기울어가는 그림자를 본다

 

언제나 바깥인 우리를 따스한 안쪽이 되게 하는

먼 길을 데굴데굴 잘도 굴러가는 성실한 바퀴 같은

때로는, 길바닥에 나뒹구는 낙엽의 손등 같은

 

,

,

그 뼈가 되고자 우리는

 


 

최해돈 시인

1968년 충북 충주 출생. 2010문학과의식신인상으로 등단. 현대시학으로 작품활동. 시집으로 밤에 온 편지』 『기다림으로 따스했던 우리는 가고』 『아침 645』 『일요일의 문장들』 『붉은 벽돌이 있음. 황금찬문학상 수상. 충북문화재단 및 2016년 서울문화재단 문학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