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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연희 시인 / 요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7.

한연희 시인 / 요란

 

 

앞니가 깨지도록 오늘을 굴러요 대디가 나를 잡아채기 전에 마미가 엉덩이를 걷어차기 전에 어서어서 굴러가요 멍 안에 새로이 자란 명 열한 시가 재빨리 한 시가 되는 일 시간의 교묘한 수법이에요 유유히 지나는 가로등 불빛처럼 얼굴이 샛노래져요 내 이름은 요란, 고장 난 시곗바늘이 한 바퀴 돌기 시작합니다

 

부엌에서 화장실로 소파에서 세숫대야로 데굴데굴 냉장고와 부딪쳐요 텔레비전을 엎어트려요 책장에서 점프하는 순간 산산조각 나요 수십 명의 내가 요란을 주워요 요란을 뭉쳐요 나는 달걀이에요 공 벌레 아니 구멍이에요 내가 내 속으로 점점 빠져들어 팔을 잃어버리고 귀를 잃어버려요 여기가 어딘 줄 모르고 나는 우뚝 섭니다

 

쉽게 깨질 거면서 대디, 뭐 그리 단단한가요? 눈썹을 어디에 붙였죠? 날이 선 조각으로 엄지를 벨까요? 술로 쩐 빨간 코가 떨어집 니다 입술이 떨어집니다 새빨갛고 두툼한 혓바닥은 마미 것, 찬장 속 접시는 깨져야만 해요 발밑에 쌓인 사금파리들아 알겠니? 모두다 알고 있는 사실을 대디랑 마미는 모르고 있단다

 

요란의 진짜 이름은 찐따개년똥구녕, 이제 할 일은 요란을 없애고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

 

어서 어서 어서라는 소리가 거실을 채워요 그래 그래라는 허밍이 흘러나와요 볼링 핀처럼 우두커니 선 대디를 향해요 요란이 원하는 요란 파랗고 노란 멍의 요란 세상에 없는 꼬마가 나를 집어삼켜요 우주에서 날아든 운석에 한 번도 깨진 적 없는 우리가 튀어 올라요 불꽃놀이처럼 쾅쾅, 그 어디에서도 흔적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한연희 시인 / 유령환각

 

 

폭설이었다

그다음은 대학살

 

어떤 나라에서는 인쇄공들이 고양이를 몰살시켰다

가죽을 벗기고 두개골을 으깨어놓았다

 

언덕 위에 쌓이고 있는 것은 때론 너무 흔해서

무생물에 가까웠다

 

책가방과 아이들이, 털장갑이, 작은 발이 수북해졌다가 서서히 지워졌다

 

눈을 잠시 감았다 뜨고 나면

환각은 사라질 거라고 믿었지만

 

선명한 유령들이 눈밭을 밟으며

돌담을 뚫고 나무를 지나며

꾸역꾸역 밀려들어왔다

 

벌판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이유로

역사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내게로

 

빠르게 다가오는 것 같았지만

그저 허공에 떠밀렸다가 흩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머리 위에서 황조롱이 한 마리가

검은 눈이 박힌 날개를 펼친 채 뱅글뱅글 맴돌고

 

이름 없이 떠도는 너희는 누구니?

누구를 본떠 생겨난 거니?

 

어린 유령들을 따라 벌판을 벗어나자 수많은 골목길

오른쪽으로 돌고 돌다 보면

문득 차가운 손이 나를 잡아당겼다

 

하얀 마대 자루를 뒤집어쓴

매끈하고 투명한 오리발의 아이가

 

울지마ⵈⵈ

ⵈⵈ울지마

ⵈⵈ울지마ⵈⵈ

 

떨어지는 눈송이를

내버려두고 주저앉아

떠오르는 이름을 나는 읊어주었다

 

, , , , , , , ⵈⵈ

 

고개를 들면

새까맣고 텅 빈 눈동자들이

마른 가지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다

 

하늘은 휑하니 열려 있을 뿐이고

 

어디선가 초록 불이 점멸하다 꺼졌다

비행기가 떨어진 것 같았지만

 

아무도 이런 환각을 보지 못했다

 

헨리 제임스, 나사의 회전.

 

-시집 폭설이었다 그다음은

 


 

한연희 시인

1979년 경기 광명 출생. 2016창작과 비평신인문학상 등단. 시집 <폭설이었다 그다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