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영숙 시인(철원) / 한낮의 해적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7.

이영숙 시인(철원) / 한낮의 해적

 

 

빙하가 녹아 지구가 반쯤 물에 잠겼다

도시의 무릎이 잘리고

저지대는 저도 모르게 무의식이 깊어져 갔다

산모들의 태몽도 물에 잠겨 퉁퉁 불었다

 

버스가 유턴하면

지하보도의 공기가 휘어지던 사거리

보도블록을 따라가다 보면 집이 나왔고

굴절되는 사물의 목록을 외지 않아도 열리던 현관문

천둥 치니

모과 떨어지는 소리 들리지 않던 밤이 있었다

심장은 그때 달의 뒤편처럼 어두워

베개를 짓누른 귀에서 들리는 맥박수나 맞춰보고 있었다

일개 소대쯤 행군하는 고요한 밤이었다

 

목이 마르니 물을 달라

모든 물이 소금물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으니

소금공장을 끄려고 해도

대륙조차 이미 들불처럼 만연했으니

 

부식되지 않은 물빛과 물맛을 찾아

금속조각같이 번쩍이는 해적들이 출몰할 시각

택시가 멎듯

해적 하나 다가와서 손목을 척 비튼다

대체, 가진 게 뭐냐

 

계간 사람의 문학2020년 가을호 발표

 


 

이영숙 시인(철원)

강원도 철원에서 출생. 1991문학예술을 통해 시 등단. 2017시와 세계를 통해 평론 등단. 서울예술대학을 졸업하고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집으로 와 호박씨, 히스테리 미스터리가 있음. 현재 추계예술대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