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숙 시인(철원) / 한낮의 해적 빙하가 녹아 지구가 반쯤 물에 잠겼다 도시의 무릎이 잘리고 저지대는 저도 모르게 무의식이 깊어져 갔다 산모들의 태몽도 물에 잠겨 퉁퉁 불었다 버스가 유턴하면 지하보도의 공기가 휘어지던 사거리 보도블록을 따라가다 보면 집이 나왔고 굴절되는 사물의 목록을 외지 않아도 열리던 현관문 천둥 치니 모과 떨어지는 소리 들리지 않던 밤이 있었다 심장은 그때 달의 뒤편처럼 어두워 베개를 짓누른 귀에서 들리는 맥박수나 맞춰보고 있었다 일개 소대쯤 행군하는 고요한 밤이었다 목이 마르니 물을 달라 모든 물이 소금물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으니 소금공장을 끄려고 해도 대륙조차 이미 들불처럼 만연했으니 부식되지 않은 물빛과 물맛을 찾아 금속조각같이 번쩍이는 해적들이 출몰할 시각 택시가 멎듯 해적 하나 다가와서 손목을 척 비튼다 대체, 가진 게 뭐냐 계간 『사람의 문학』 2020년 가을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지훈 시인 / 사구(砂丘) 외 1편 (0) | 2022.09.27 |
---|---|
허호석 시인 / 마이산골 해맞이 외 1편 (0) | 2022.09.27 |
김하늘 시인 / 12월 21일 49초 (0) | 2022.09.27 |
한연희 시인 / 요란 외 1편 (0) | 2022.09.27 |
심창만 시인 / 수련(睡蓮) 외 1편 (0) | 2022.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