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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백은선 시인 / 자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7.

백은선 시인 / 자매

 

 

색색의 조명등이 나에게 여러 개의 그림자를 달아준다

 

우리 자매는 몇 가지 놀이를 가지고 있다

어떤 날엔 촛농 같은 쿠키를 집어 먹으며

서로의 이름을 바꿔 부르기로 한다

 

맹세를 할 때는 맹세만을 생각한다

 

불어나는 혓바닥처럼

식탁 밑에 쭈그리고 앉아

우리는 다툼을 꾸며낸다

너는 이제 영영 네가 되어야만 할 거야!

 

거품이 터지는 소리

물속에 잠겨 있을 때

내가 흉내내는 동물의 울음소리들

빛은 내 몸을 구석 투성이로 만든다

 

언니는 오래도록 식탁 아래 남아

헤아린다 접시를 쥐고

하나두울 하나 다시 하나

 

가느다란 빛이 두 귀를 관통한다

 

초식동물들의 몸 안에 새겨진

어두운 울음을 생각하고 싶다

가능하다면 리본처럼 풀어지는 혀를

훔치고 싶다

 

 


 

 

백은선 시인 / 영원

 

 

흰 배가 묶여 있는 선착장을 생각해

 

나무에 붙어 있는 매미 허물

 

천천히 썩어가는 나무 위 복숭아

 

계석해서 계속을 계속하려는 계속의 종

 

열망에 사로잡혀 단단해지는 것

 

그거 아니, 매미는 칠십 년 동안 땅속에 있는대

한번 울었던 자리에서는 다시 울지 않는대

 

느슨하게 결박된 배가 물결에 따라 흔들린다

 

나무와 나무가 부딪는 텅, 소리

 

나는 아침에 일어나 오래전에 좋아했던바다 밑바닥에서의 여섯 날을 들었어 그 노래를 들으며 트럭을 몰고 다니는 꿈을 꿨거든 그걸 들으면 슬퍼야 한다고 스스로 타이르던 것과 끓고 있던 미역국의 짠내가 생각난다

 

그토록 부드러운 살 속에 그토록 단단한 씨앗

 

그건 비유 같고

 

그건 이상하고 아픈 마음의 형상 같고

 

그건 부질없음의 다른 말 같고

 

매미는 수컷만 운다 암컷을 부르려고

징그럽고 슬픈 것이다

 

나는 바다 밑바닥을 구르며

엿새 동안

하루에 한 번씩 여섯 번

네가 두고 간 작은 단단한 것을 꺼내보았다

 

흙 속에서 칠십 년을 보내는 매미

우는 매미

 

, 신기하다 근데 불쌍한 것 같아

네가 했던 말

내가 고개를 끄덕였던 말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도 불쌍하지 않다

매미는 흙을 견디지 않는다

거기가 집이니까

 

-시집, 도움받는 기분, 문학과지성사, 2021

 


 

백은선 시인

1987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2012문학과 사회를 통해 등단. 김준성 문학상. 시집 <가능세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들로 만들어진 필름> <도움받는 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