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은선 시인 / 자매 색색의 조명등이 나에게 여러 개의 그림자를 달아준다 우리 자매는 몇 가지 놀이를 가지고 있다 어떤 날엔 촛농 같은 쿠키를 집어 먹으며 서로의 이름을 바꿔 부르기로 한다 맹세를 할 때는 맹세만을 생각한다 불어나는 혓바닥처럼 식탁 밑에 쭈그리고 앉아 우리는 다툼을 꾸며낸다 너는 이제 영영 네가 되어야만 할 거야! 거품이 터지는 소리 물속에 잠겨 있을 때 내가 흉내내는 동물의 울음소리들 빛은 내 몸을 구석 투성이로 만든다 언니는 오래도록 식탁 아래 남아 헤아린다 접시를 쥐고 하나두울 하나 다시 하나 가느다란 빛이 두 귀를 관통한다 초식동물들의 몸 안에 새겨진 어두운 울음을 생각하고 싶다 가능하다면 리본처럼 풀어지는 혀를 훔치고 싶다 백은선 시인 / 영원 흰 배가 묶여 있는 선착장을 생각해 나무에 붙어 있는 매미 허물 천천히 썩어가는 나무 위 복숭아 계석해서 계속을 계속하려는 계속의 종種 열망에 사로잡혀 단단해지는 것 그거 아니, 매미는 칠십 년 동안 땅속에 있는대 한번 울었던 자리에서는 다시 울지 않는대 느슨하게 결박된 배가 물결에 따라 흔들린다 나무와 나무가 부딪는 텅, 소리 나는 아침에 일어나 오래전에 좋아했던「바다 밑바닥에서의 여섯 날」을 들었어 그 노래를 들으며 트럭을 몰고 다니는 꿈을 꿨거든 그걸 들으면 슬퍼야 한다고 스스로 타이르던 것과 끓고 있던 미역국의 짠내가 생각난다 그토록 부드러운 살 속에 그토록 단단한 씨앗 그건 비유 같고 그건 이상하고 아픈 마음의 형상 같고 그건 부질없음의 다른 말 같고 매미는 수컷만 운다 암컷을 부르려고 징그럽고 슬픈 것이다 나는 바다 밑바닥을 구르며 엿새 동안 하루에 한 번씩 여섯 번 네가 두고 간 작은 단단한 것을 꺼내보았다 흙 속에서 칠십 년을 보내는 매미 우는 매미 와, 신기하다 근데 불쌍한 것 같아 네가 했던 말 내가 고개를 끄덕였던 말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도 불쌍하지 않다 매미는 흙을 견디지 않는다 거기가 집이니까 -시집, 『도움받는 기분』, 문학과지성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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