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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배창환 시인 / 시인의 비명(碑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8.

배창환 시인 / 시인의 비명(碑銘)

 

언제나 사랑에 굶주렸으되

목마름 끝내 채우지 못하였네

 

평생 막걸리를 좋아했고

촌놈을 자랑으로 살아온 사람,

아이들을 스승처럼 섬겼으며

흙을 시의 벗으로 삼았네

사람들아, 행여 그가 여길 뜨거든

그 이름 허공에 묻지 말고

그가 즐겨 다니던 길 위에 세우라

 

하여 동행할 벗이 없더라도

맛있는 막걸리나 마시며

이 땅 어디 어디 실컷 떠돌게 하라

 


 

 

배창환 시인 / 가야산 이야기

 

높은 산 먼 길 덕에

대구서 가장 늦게 바람이 불어와

아직은 산비탈에 칡덩굴이 녹음을 덮고

그 깊숙한 가슴 안쪽에 목장도 몇 남겨둔 청정 지역

성주 가천 금수 가야산 북사면 신계 용사 무학 골짝에

여름엔 발 디딜 자리 없이 빽빽한 장터를 이룬다

 

사람들은 멋도 모르고 몰려와서

찬물에 발 넣고 고기 몇 근 구워 먹고

먹다가 토하고 똥오줌도 싸고 후라이팬 기름도 씻고는

비닐봉지에 쓰레기 곱게 넣어 바위틈에 끼워두고

해가 닷 발이나 남았는데도 길 막힌다고

꽁무니에 연기 달고 쌩쌩 달아나는데

 

사람들은 저 골짝 안에서 얼음물 나오는 줄은 알아도

그 옛날 동란 적에 이 골짜기 어딘가로

콩알 먹으러* 끌려간 사람들이

요새도 가끔씩 허옇게 나와 울고 간다는

귀신 이야기는 잘 모른다

 

좀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증산 수도산까지

항일 전사들의 무대였던 산맥들이 꿈틀꿈틀 이어지는데

그들이 기적처럼 살아낸 세상이 있어

저녁마다 첩첩 골짝 능선들이 훨훨 타오르고

우리가 발 담근 이 물이 더 차고 시퍼렇다는 걸 잘 모른다

 

*죽음을 당하다.

 


 

배창환 시인

1955년 경북 성주에서 출생. 경북대 국어교육과 졸업. 1981세계의 문학1980년 어느 날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잠든 그대, 다시 사랑하는 제자에게, 백두산 놀러 가자, 흔들림에 대한 작은 생각등이 있음. 분단시대동인으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