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창환 시인 / 시인의 비명(碑銘) 언제나 사랑에 굶주렸으되 목마름 끝내 채우지 못하였네 평생 막걸리를 좋아했고 촌놈을 자랑으로 살아온 사람, 아이들을 스승처럼 섬겼으며 흙을 시의 벗으로 삼았네 사람들아, 행여 그가 여길 뜨거든 그 이름 허공에 묻지 말고 그가 즐겨 다니던 길 위에 세우라 하여 동행할 벗이 없더라도 맛있는 막걸리나 마시며 이 땅 어디 어디 실컷 떠돌게 하라 배창환 시인 / 가야산 이야기 높은 산 먼 길 덕에 대구서 가장 늦게 바람이 불어와 아직은 산비탈에 칡덩굴이 녹음을 덮고 그 깊숙한 가슴 안쪽에 목장도 몇 남겨둔 청정 지역 성주 가천 금수 가야산 북사면 신계 용사 무학 골짝에 여름엔 발 디딜 자리 없이 빽빽한 장터를 이룬다 사람들은 멋도 모르고 몰려와서 찬물에 발 넣고 고기 몇 근 구워 먹고 먹다가 토하고 똥오줌도 싸고 후라이팬 기름도 씻고는 비닐봉지에 쓰레기 곱게 넣어 바위틈에 끼워두고 해가 닷 발이나 남았는데도 길 막힌다고 꽁무니에 연기 달고 쌩쌩 달아나는데 사람들은 저 골짝 안에서 얼음물 나오는 줄은 알아도 그 옛날 동란 적에 이 골짜기 어딘가로 콩알 먹으러* 끌려간 사람들이 요새도 가끔씩 허옇게 나와 울고 간다는 귀신 이야기는 잘 모른다 좀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증산 수도산까지 항일 전사들의 무대였던 산맥들이 꿈틀꿈틀 이어지는데 그들이 기적처럼 살아낸 세상이 있어 저녁마다 첩첩 골짝 능선들이 훨훨 타오르고 우리가 발 담근 이 물이 더 차고 시퍼렇다는 걸 잘 모른다 *죽음을 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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