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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용욱 시인 / 그날이 오늘 같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8.

권용욱 시인 / 그날이 오늘 같다

 

 

숱한 겨울을 넘긴

4월의 배반동 들녘이었다

그를 만나고 오다

마을 앞 뙈기 못자리 무논에 차를 세우고

보글보글 물 부푸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그림자는 어둠에 녹아

고원재로 돌아가고

서쪽 낭산(狼山)이 남산 옆구리에 기댈 때

 

하현의 틈을 죄는 초승달 같은

보불로에 걸터앉은 벚꽃잎 같은

낮은 개구리 소리 들었다

 

솟을대문 따라 나오던 파초 소리

담장 불쑥대던 진순이의 흰 꼬리 소리

 

마당과 장독대와 금낭화와

치미와 막새기와 골지붕은 여기 남고

이제 사람은 현곡 아파트로 들어가야겠다는

대청마루의 마른 소리도 들렸다

 

그도 늘 거기 서 있었을 것이다

억머구리 와글와글 밤새 들끓는 여름날도

벼 이삭 곱습곱슬 세는 가을밤에도

 

외통 같은 시 한 수 만나러

'물소리 천사'처럼 서 있었으리라

 

'온유'

'비발디풍으로 오는 달'

'나는 가끔 빨간 입술이고 싶다'

'아무리 생각해도 먼 곳이 가까웠다'는 구절

'흐르는 섬절영(絶影)의 파도 소리로 만났으리라

 

시인 김성춘,

평생의 교직을 떠나

고향 아닌 고향 서라벌의 들판을 걷는 예인,

 

그를 만나고 오던 밤길이

오늘은 여기 악양 무덤이들에 흐른다

그를 닮은 늦은 그림자 하나,

나직이 물소리를 따라 듣고 있다

 

 


 

 

권용욱 시인 / 밭을 만나다

 

 

오랜만에 흙의 소식을 받습니다

그날 이후 당신이 어디 사는 줄 몰랐습니다

누구는 접장이 되어 아파트 이 층에 산다 하고

누구는 동서 없이 나돌다 빈주머니로 떠났다 했습니다

오늘 문득 누런 봉투에 필기체로 갈겨 쓴

당신의 편지를 받으니 어머니마냥 반갑습니다

그러셨군요 고향 텃밭에 숨어 살았군요

시세 값도 안 되는 손글씨로 답장을 씁니다

한 번도 혁명을 꿈꾸지 못한 손끝으로

한 톨 한 톨 눌러 쓰는 제 정성에 놀랍니다

이만 년 전 잊은 줄 알았던 아---여 노래가

몸 구석에 남아 손가락을 잘도 부립니다

당신이 좋아하던 필체를 따라 놉니다

당신이 구겨버린 종이를 펼쳐 냅니다

당신의 숫자 당신의 각도 당신의 깊이와 간격

당신이 나를 안부한 것이 아니라

내 몸이 당신을 잊지 못하고 견뎠습니다

그 까닭을 열 줄 스무 줄 파고 묻어 둡니다

만남 이전의 외도야 잡초처럼 뽑으면 될 일

주말마다 답장을 쓰겠습니다 꼼꼼히 두 계절이면

편지지마다 무거운 당신으로 위로 받겠습니다

 


 

권용욱 시인

1964년 경북 경주에서 출생. 2014시에로 수필, 2016포엠포엠으로 시 등단. '詩作나무'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