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재연 시인 / 순례자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8.

이재연 시인 / 순례자

 

 

입 속에서 얼음을 녹인다

어느 때에 두 발이 남루해질 것이라고

돌이 쌓여 있는 좁은 길을 밤이 지나간다

 

새벽 불 켜진 상점을 찾는 일일지라도

너와는 입장이 달라

매번 입장이 달라

 

연휴에도 흐린 유리창 밖에서

푸른 꽃이 피고 번지는데 그것을 완전히 잊어버린다

 

어디에서도 흔한 포유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주름이 많은 어미를 바라보며 표정을 바꾸지 않는다

그것이 생활 속에 남아 있어

잔물이 불어나는 물가에 서 있다

 

목이 없는 꽃병 속의 물을 갈아주며

내가 단지 건물 속에 갇혀 있다면

건물이 우리에게 다정히 속삭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다

하늘도 알고 있다

홀로 자고 일어난 노인도 알고 있다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면

조상의 이름을 새긴 돌 위에 사월의 눈 내린다

검불 속에서 머위 잎이 쑥 올라온다

 

새벽별 떨어지던 자리에

무거운 수레바퀴 자국을 남기며

곡우가 지나간다

 

계간문학들2020년 여름호 발표

 

 


 

 

이재연 시인 / 위험하고 아름다운

 

 

이제 봄은 가고 있다

어디로 가고 있다

이제야 내가 건물이 아닌

건물 밖을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

 

다른 것은 후회하지 않는다

어떤 말을 들어도 예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는데 전화가 온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네가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소주를 먹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전화를 받는다

 

시간아 이제 연습을 하자

조금씩 먹고 조금만 웃자 그리고 잊어버리자

소주 냄새가 훅 밀려드는 봄밤

짧고 편하게 살겠다는 말은 하지 말자

 

여기는 이미 오래되었고

위험하고 아름다워

허무하고 맹랑한 곳이니

입을 꼭 다문 사람들과 함께 신호등을 건너

그냥 저기 미라보다리 아래로 흘러가버리자

 

계간시와 문화2021년 여름호 발표

 

 


 

 

이재연 시인 / 바람에 좀 흔들렸어요

 

 

새들이

바람의 힘으로 허공을 난다고 생각할 때

푸른 숲은 비교적 고요했지만 바람에 좀 흔들렸어요

추워지면 혼자 사는 사람이 마주해야 하는 이른 아침은

더 크고 헐렁해질까 걱정했어요

 

어린 풀들은 갓 태어난 듯 푸르러 눈이 따가웠고

큰 나무들은 가던 길을 멈춰 버렸어요

한 계절에 피워 올렸던 모든 일들을 버릴 준비가 끝난 듯

나무가 우리 곁을 지나가고

우리는 나무 곁을 자나며 끝없이 걸었어요

 

오래된 고가 다리 밑 교차로를 지나

먼지 낀 골목의 모텔과

언제나 문이 닫혀 있던 오락실을 지나

벌처럼 날개를 반짝이며 겨울이 왔어요

너무 일찍 온 겨울 때문에

더 추워진 미래도 이미 미래가 아닌 듯

우리와 함께 걸었어요

 

빠르고 늦는 것 크게 생각하지 않지만

요즘 나는 푸른 녹이 슬어버린 놋그릇을 생각했어요

할머니가 쓰고 대를 이어 어머니가 쓰던

그 놋그릇을 생각하다 겨울이 왔어요

 

빛을 다 잃어버린 구리와 구리 사이로

오늘 아침 겨울이 왔어요 어느 조용한 이른 아침

잊어버리자 한 것을 한없이 생각하다 겨울이 왔어요

 

늦고 빠른 것 굳이 생각하지 않으려 하지만

수년 동안 사라졌다 나타난 막냇동생이

일찍 가버린 형의 묘지에 가서

미처 다하지 못한 말을 일방적으로

혼자 하고 왔다고 하는 날 겨울이 왔어요

 

이제는 크고 많은 것 필요 없이 그냥 이렇게

살아보겠다고 하는데 하필 겨울이 왔어요

지금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겨울이 왔어요

 

계간시작2021년 겨울호 발표

 

 


 

 

이재연 시인 / 어두워져가는 강가에 발자국을 남기며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매일 한 시간 가량을 걸어야 한다는 사람과 함께

오후엔 강으로 나갔다

 

자신을 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람들만이

종종 강가로 나가 물을 따라 걷는다

물보다 빠르게 걷거나 느리게 걸어도

아무도 그것을 의식하는 사람은 없다

 

땅이 크게 휘어질수록

물속에 홀로 서 있는 왜가리가 늙어 보여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조용히 습지를 따라 오래 걸었다

 

이따금 한 무리의 딱새가

덤불숲을 파고들어 찰나를 바스락거릴 뿐

굳이 해야 할 말을 찾지 않아도 되었다

 

어두워져 가는 강가에 발자국을 남기며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을

다가오려고 하는 것을

 

몇 번이나 말하려 했지만 말 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그렇게 요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흐르는 물과 내가 완전히 멀어질 때 때가지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Mook세종마루2019년 상반기호 발표

 


 

이재연 시인

1963년 전남 장흥에서 출생. 광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5전남일보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2012년 제1회 오장환 신인문학상 당선. 시집으로 쓸쓸함이 아직도 신비로웠다(실천문학사, 2017)가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