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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양은숙 시인 / 미늘*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8.

양은숙 시인 / 미늘*

- 시간의 얼굴 4

 

 

잠시 뒤 경련이 올 거다

등이 부르르 떨리고 나서, 둥근 눈이 맑아졌다

무호흡,

입천장을 꿰뚫린 내 지느러미는 조용하다

움직일수록 더 깊이

미늘은 살을 뚫는다 어쩌면 생은 미늘이었는지

모른다

첨예한 바늘을 휘어지게 입에 물고

역방향의 질식으로 이끌리는 알 수 없는

이 물속의 유영遊泳

마지막 숨까지 함께하는 건 통각痛覺이다

무호흡, 시간은 멎고

마알갛게 드러나는 물속의 풍경

마블링으로 울렁이는 물살

찬란한 물풀과 반짝이는 치어들

물 위를 떠가는 상현달 같은 나뭇잎

물살을 저으며 떠다니는 저, , 빨간, 발바닥 오리들...

내가 살던 물의 세상이 언제 이토록 아름다웠나

퍼덕, 숨 뒤틀리고

아가미까지 힘겹게 전해오는 경련과 경련 사이는

평생의 풍경보다 길고도 깊다

 

*미늘: 낚싯바늘 끝의 역방향 갈고리

 

 


 

 

양은숙 시인 / 힐베르트의 호텔

 

 

힐베르트 호텔에서 만난 사람

나무그늘 사이로 멀어지네

우리는 늘

누군가의 요람을 지켜주며 살았지만

요람은 낯선 화이트홀처럼

다른 누군가를 계속 출산했네

힐베르트 호텔에서 만난 사람

검은 우주 속으로 하나둘 씩 멀어져가고

죽음을 뒤늦게 탄생으로 알기까지

처음처럼

우리는 모두 아기요람이 달려있는

나뭇가지 사이에서 잠드네

천년목, 이천년목, 삼천년목

수천 광음光陰이 찰나刹那로 물들어 언제나 열려있는

힐베르트 호텔엔

나무와 나무의 정령,

소리 없이 비가 내리네

 

*힐베르트의 호텔 : 수학자 David Hilbert(1862~1943)무한에 관한 수리적 상정이다. 힐베르트의 호텔에 k번째로 투숙하는 승객은 {(2k-1)2}^{n-1}의 번호를 얻는다.

 

 


 

 

양은숙 시인 / 호모두르homo-door

 

 

1

나무에서 내려온 자

그리하여 맨 처음 동굴로 들어간 자

누구인가, 신들의 시간으로부터

사람의 시간을 훔쳐낸 자,

맨 처음 문을 만든 자는 누구인가

둥근 동굴 밖으로

붉은 구름 희게 물들며 눈부신 해가 뜨는

거대한 풍경을

웅크린 채 멀찍이 바라보던 경외의 시간

등을 굽히고

두려움의 그늘에서 씨앗과 열매를 줍고

먹다 남긴 동물의 사체를 훔치며

쫓기다 굶주리다 도망치다 고단하게

하루치의 끼니를 잇던 자

 

2

하루를 일생으로 산

태양이 죽고 땅거미와 함께 예고처럼

온갖 신들의 시간이 내려오는

어스름, 달과 나무와 바위에

신령한 혼이 흐르는 두려운 야행

훔친 사람의 시간을 동굴 속 불길로 사르던

호모두르

토막잠을 자면서 두 귀를 세우던 등 뒤

나무로 엮은 헐거운 문이

안과 밖을 갈랐다

대자연은 빛이었고 사람은 어둠이었다

사람과 사람을 가른 문,

맨 처음 그 문을 만든 자는 누구인가

 

3

그들은 배에 자물통을 박아 넣고

열쇠로 쑤시고 버턴으로 누르고 지문을 들이댄다

내게 있는 건 시조새의 눈알 같은 카메라

나의 일차적 목적은 방어다

선택적 방어를 위해

언제든 약속에 맞게 나를 잠근다

그때의 나는 벽이다

아무도 뚫지 못한다

누구도 나를 통과하지 못한다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단절이다

정문에서 현관까지 그들은 도합 세 개의 문을 통과해야

집으로 들어올 수 있다

그들을 보며 엄연했던 나의 전모를 떠올린다

한낱 헝겊이던

한낱 나무였던, 거적이었던, 울타리였던

헐거운 나의 조상을 잊어버린 나는

어쩌면 타락이다, 문에 대한 문의

기만이다, 진화가 아닌 퇴화다 슬프게도

지금 나는 벽이 되는 중이다

 

4

닫혀서 벽이 된 나는

감감히 서서 조금만 열린 문이 되길 바란다

살그머니 고양이가

강아지와 바람과 온갖 냄새가 드나드는

조금 열린 문

그러면 지문투성이 내 몸에도 무슨 계절이

찾아올 것이다, 종종 그런 생각은 마침내

봄밤의 차분한 습기를

내게 실어다주고 다소 나를 늘어지게 한다

장마의 우울도 조금씩

마시면서 나는 조금씩 상하고 조금씩 더 늘어진다

세월이라 하자, 내가 앓는 이

천천히 낡고 천천히 삐걱이는 병

병들어도 나의 본분은

일차적 목적에 복무한다, 골백번 나는

방어를 위한 존재다

 

5

크로마뇽인 같은 정문 경비를 젖히고

아파트 현관을 열고

엘리베이터 문을 거쳐 마침내 15

자기 집 문 안에 들어서는 사내를

네모난 베란다 문이 마주 본다

안방문과 안방창문

싱크대문화장실문냉장고문장식장문

도합 스무 개 넘는 모든 문들이 숨 멎은 채

그를 바라본다

주춤거리는 사피엔스 사피엔스

컴퓨터를 켠다, 화면에 뜨는 MS 윈도우

또 다른 문,

장막처럼 내려오던 신들의 시간을

버튼 하나로 차단한다

차단된 문명에 비로소 안도하는 사내

끊임없이 문을 만드는 자

꿈에도 열쇠 소리가 나는 자

문 밖의 문에서는

문 안의 문이 보이지 않는다

 


 

양은숙 시인

서울 출생. 숙명여자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2011미네르바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달은 매일 다른 길을 걷는다(시평, 2010)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