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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은석 시인 / 탕제원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8.

박은석 시인 / 탕제원

 

 

탕제원 앞을 지나칠 때마다 무릎의 냄새가 난다

 

용수철 같은 고양이의 무릎이 풀어지고 있던 탕제원 약탕기 속 할머니는 자주 가르릉 가르릉 소리를 냈었다 할머니의 무릎에는 몇 십 마리의 고양이가 들어 있었다 가늘고 예민한 수염을 달인 마지막 약, 잘못 쓰면 고양이는 담을 넘어 달아난다

 

밤이면 살금살금, 앙갚음이 무서웠다. 고양이를 쓰다듬듯 할머니의 무릎을 만졌다 몇 마리의 고양이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던 할머니들이 절룩거리며 나타났다 빗줄기가 들어간 무릎의 통증 등에 없힌 밭고랑 한가득 들어 있는 무릎

 

탕제원 오후는 화투패가 섞인다. 화투패는 오래 달일 수가 없다 약탕기 안에 판 판의 끗발들이 성급하게 달여지고 있지만 가끔은 불법의 처방이 멱살을 잡기도 한다

 

약탕기 속엔 팔짝팔짝 뛰던 용수철 몇 개 푹 고아지고 있는 탕제원, 가을 햇살은 탕제원 주인의 머리에서 반짝 빛난다. 무릎들이 무릎을 맞대고 팔월 지나 단풍을 뒤집고 있다

 

 


 

 

박은석 시인 / 정육점과 자목련 사이에 내리는 비

 

 

유리문 너머

소의 넓적다리 걸려 있다

자색 도장 자국이 자목련처럼 피어 있다

느릿하고 온순하던 얼굴은 어디에 있을까

내내 궁금한 듯 비가 내린다

빗방울 맞아 부르르 떨던

등짝은 또 어디에 있나

무너질 것 같지 않던 한 덩치가 떠난

내 안에 냉장고 소음만 부르르 떤다

지상엔 그 무엇도 불완전하고

맥박 소리는 힘 빠진

한 몸을 연신 되새김질 한다

 

빗줄기에 묶여 있는 정육점 냉동고가

커다란 한 마리 소로 보일 때

자목련 꽃송이를 우적우적

씹어 먹는 소리로 서성거릴 때

차갑고 서러운 냉동고 속은 캄캄하게 오리무중이다

 

온몸이 상처여도 저렇게 걸릴 수 있고

자색 꽃잎 하나 얻을 수 있다

누구라도 툭 건드리고 가면

자색 숨결 하나

허가 받았다는 듯

툭 떨어트릴 수 있을 것 같다

 

 


 

 

박은석 시인 / 테라코타

 

 

흙으로 빚었다는 우리는

언제까지 말라야 하는 것일까

한여름 햇볕에서

비바람 지나 한겨울까지

오로지 마르기만 해야 하는 것일까

 

짹짹 흙이 트면서도

앙상한 뼈들이 보이면서도

끝이 없는 죄인으로 살아야 하는 걸까

 

어쩌다 몸의 한 곳이 부서질 때마다

붉은 피가 또는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면

바짝 마르기까지는 아직

멀고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 마르면 부서지는 걱정을 한다

갈라지기도 하고

틈 사이에서 아주 천천히

한 이름으로 성별로 굳어 가는 것

 

평생을 마른이가 오늘 활

활 불 속에서 죽음으로 굳어진다

죽음의 냄새는 구운 흙 냄새이다

바람의 무의식으로 들어가

굳어 가는 것이 끝나면 싸늘하게

공중을 분해시킬 수 있을까

 

마르지 않기를 방어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더 붙들고 싶어서일까

그렇다면 사막은, 돌은 얼마 기간 동안 마른 것들일까

생물의 시공을 넘어서까지

마르고 있는 것들은

잘 견디고 있는 것일까

 

 


 

 

박은석 시인 / 민들레의 창작 노트

 

 

나는 노란 느낌표

푸른 공기를 들이마시면

톱니 모양 이파리들이 쓱싹쓱싹

봄의 날짜들을 썰고 있다

며칠 전엔 노랗게 물들인 동네 언니인 줄 알았다가

또 며칠 후에 하얗게 늙은

할머니의 머리카락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전생들이 떠돈다

하얀 종이 위를 날아다니며

창밖 공중을 헤집고

가끔은 도시의 하늘을 끊임없이 맴돈다

가난한 동네의 갈라진 벽 틈에서

누군가 쌓고 있는 바벨탑을 본 적이 있다

 

벽에서도 꽃필 수 있다는 것

처음에 고개를 숙인 채 가느다란 구멍 사이를 빠져나오고

뚫어져라 바깥을 바라볼 뿐이었지만

종일토록 생각을 비틀다 보면

탑의 설계는 온통 망상으로 하얀 색이 되고 만다

 

폭언이 생기고 추운 말들이 일치하면

서서히 지워 가며 말라가는 것이다

그 작고 몽톡한 신발이 생기고 휘청거리는 긴

대롱 위로 몰려든 호흡들

머리핀처럼, 우주선처럼 날아가는

한 편의 완성된 기체가 되는 것이다.

 

 


 

 

박은석 시인 / 메타세콰이어 길

 

 

자전거는 몸무게보다

나이를 더 무거워 하고

덜컹거리는 것은 여전하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 보면 양 옆에서 지나치는 메타세콰이어들, 아직 변성기 안 지난 애인들 같다. 양 옆에서 팔짱 껴 오던 푸릇한 콧수염 같다

 

아직도 자전거는 덜컹거리며 뛰고 이제 막 돋아난 음모처럼 메타세콰이어 그림자들 진다

 

첫 키스는 소실점처럼 아득했다

그 다음부터는 나무마다 기대었던 기억이 있다

 

예전에 뛰었던 자전거, 지금도 여전히 자전거 바퀴는 두근두근 굴러 간다

 

길의 중간에선 양쪽이 다 소실점,

아득하다

지나간 추억도 아득하고

살아갈 날도 아득하다

 

바람을 따라 휙휙 지나치던 애인들은 어느 소실점들로 몰려가 있을까

어느 길 옆을 아득히 앞질러 가 있거나 뒤처져 있을까

 

파닥이는 이파리를 움켜쥐고 여전히 달리고 있는 메타세콰이어길의 소실점을 향해 자전거 바퀴는 울렁울렁 달려간다.

 

 


 

 

박은석 시인 / 신천 온천탕

 

 

처음엔 아랫목인 줄 알았다고 한다

지구 반대편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군불 때는 누군가가 있다고 말한다

그 아랫목에다가 기둥을 세우고

문을 달고 욕조를 놓았다고 한다

뜨거운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고

신천 온천탕은 마을의 아랫목이 되었다

 

지구의 식은 귀퉁이들

마을 노인들이 모여 든다

한겨울이 몸속 가득한 사람들이

아랫목으로 몰려든다

 

지하 350m 깊숙한 암반에서

솟아 나오는 58도의 중탄산나트륨의 천연수

오늘은 물이 더 좋네, 깔깔거리는

으슬으슬 몸이 추운 할머니들

미끌미끌한 물 속에 검은 꽃잎이 떠 있다

뽀글뽀글 물방울 가득 전신을 맡기고

불그스름하게 봄날을 첨벙거린다

이곳에 오면 어느 구석에

아버지의 밥공기가 따듯하게 숨어 있을 것 같고

이불 다툼했던 자매들이 여전히 깔깔거리고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던 군불 냄새가 날 것 같다

누구나 한기를 만날 때면

자연스럽게 찾아드는 아랫목

목만 내놓고 물의 이불을 끌어 덮는다

 


 

박은석 시인

1971년 전남 광주 출생. 방배총신대 졸업. 지구문학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2015부산일보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시집 봉숭아 꽃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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