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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기덕 시인 / 악마의 중독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8.

김기덕 시인 / 악마의 중독

 

 

염소가 검은 상자 위에 쪼그리고 앉아 배를 열어보았지

젖이 범람한 젖꼭지에서 쓰디쓴 강이 흘렀어

어둠 속에 뿔은 왕관처럼 반짝였고

아미에 새겨진 펜타 그램에선 게이의 웃음이 새어나왔어

박쥐의 은빛 날개를 퍼덕이며 펼친 오른쪽에 선명했던 못자국

중지와 약지를 벌린 각인에 혀를 끼우고

왼손에 들었던 횃불로 바람의 꼬리에 불을 붙이자

메케하게 피어난 악성 루머들

사람들은 스스로 검은 상자에 매달린 중독성의 쇠사슬을 목에 걸었지

자동조절 되지 않는 나의 몸에서도 고열이 일었어

통증으로 웅크린 배를 독수리의 발톱이 휘젓자

거친 호흡으로 들썩이던 종잇장은 찢겨져

쏟아진 폐를 독수리가 인공호흡기처럼 입에 물고 숲을 흡입했어

노을이 빠져나간 얼굴에서 금세 어둠이 흘러나와

달의 내장을 꺼낸 굴뚝이 목에다 뱀처럼 구름을 두르고 방안을 노려봤지

구멍 난 튜브 속에선 지독한 황사와 매연,

미세먼지들이 쏟아져 나왔고

나의 목구멍에서도 뱀의 혓바닥이 아지랑이로 피어올랐어

독수리가 홀연히 날아간 후에야 검은 상자 위에 염소가 목의 쇠사슬을 풀었지만

손바닥을 뒤집는 타로카드 15

재가 된 사람들은 안개처럼 공중에 떠다녔지

한 방울 눈물과 백색연기로

 

 


 

 

김기덕 시인 / 배말뚝

 

 

배가 부른 대리석에 팔뚝만한 쇠사슬이 감겨 녹물을 흘린다

밀물로 왔다 썰물로 빠져나간 배를 잡지 못한 선착장에서

비바람 휘몰아치던 격정의 밤을 잉태하고

끝과 끝이 만나 다시 돌아오는 수평선을 바라본다

 

쇠사슬로 동여매도 물처럼 빠져나가 매어둘 수 있는 것은

바람의 흔적과 끈적거리며 매달리는 비린내뿐이라는 걸 안다

부침하는 물살과 배반의 폭풍에 밀려온 난파선의 이야기를 뼈에 묻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구름도 보내고 갈매기도 보내고

뿌리로 남아 파도처럼 안으로 멍들어 가는 바다를 닮아간다

 


 

김기덕 시인

2000시문학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 열매들은 소리 지르지 않는다』 『십자가 나무1, 2』 『사랑한다는 메시지가 낡아 보인다와 시론집 이미지의 공식』 『주역에서 시를 보다』 『상자 속의 수평선과 평론집 뇌과학비평이 있음. 푸른시학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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