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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순옥 시인 / 질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8.

김순옥 시인 / 질감

 

 

방을 빼라는 집

주인의 목소리가 뜨거워

엉뚱한 방에 들어가 누워보아요

문지방에 끼인 돌멩이가 으스러져요

감긴 눈을 씹었어요

 

생선 꼬리라도 주세요

돌멩이가 입안에서 굴러다녀요

미안해요 뱉을 수가 없어요

입 깊숙이 밀어 넣어 볼까요?

 

늙은 복숭아 껍질에 돋은 거웃이

천 일 동안 타고 있대요

꽃을 달고 웃는 모습이 보고 싶어요

 

노랗게 곪아가는 눈

저만치

나는 엄마보다 더 늙었고

낯익은 젊은 여자 하나

생뚱맞은 얼굴로 거울을 빠져나가요

 

불 꺼진 방 아랫목에 우두커니

앉아 있어요

 

-2017국제신문신춘문예 당선시

 

 


 

 

김순옥 시인 / 윤달

 

 

내 안의 날씨가 너무 어려워

 

중얼거리는 말을 모아 쌓으면 기다란 목이 되는

목에 쌓아 올린 새봄을 읽느라 기린은

오늘도 지각이다

 

빵집 출입문에 喪中이라고 쓰인 흰 종이가 붙었다

우유를 따르던 기린이

어제는 구름을 마시고 싶다고 했는데

벚나무와 목련 사이

 

불쑥 밀려든 파도가 흩어져

처음부터 다시,

 

오늘 빵집 앞을 서성이다가

喪中이라고 쓰인 나를 꺼내 술잔에 담아두고

헐거운 신발을 고쳐 신는데

끈이 손에 닿지 않는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기린

아프리카 사바나 어딘가에서 만날 법한

체크무늬 남방을 입은 기린

 

세상에 없는 노래를 부를 때

매번 겪는 시계 방향인데

죽어 본 적 없는 나는 꽃집 앞을 지나는 기린을 본다

 

목이 넘치거나 다리가 긴 봄이지

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부분이야

 

계간 리토피아2021년 여름호 발표

 


 

김순옥 시인

경북 선산에서 출생. 2017국제신문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