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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은정 시인 / 진흙 정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9.

박은정 시인 / 진흙 정원

 

 

몇 날 며칠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사람들은 이 집을 방문하지 않는다.

 

여기서 잠을 좀 자고 가도 될까요?

 

집주인은 여자를 모르는 사람처럼 쳐다보다 아무 말 없이 보던 TV를 본다. 그렇게 한동안 화면을 보며 낄낄거리다가 여자에게 말했다. 애가 우는데 거기서 뭐해.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서럽다는 듯, 힘껏 운다.

 

이 집은 언젠가부터 화분과 장판 밑에 벌레가 우글거리고 악취가 진동하여 방문객이 오지 않는다. 하지만 여자는 갈 곳이 없고 밖은 너무 추우니 집주인에게 허락을 구해야 하고

 

딱 하룻밤만 있을 곳이 필요해요.

 

집주인은 베란다 화단에 물을 주고 창밖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운다. 그때 말이야. 대사를 까먹어 무대를 박차고 나간 배우는 여전히 연기를 하고 있을까?

 

혼자 울던 아이가 네 발로 기어 나와 여자를 보며, 더 크게 운다.

 

아이의 손발에는 진흙이 묻어있다. 이 아이의 울음 속으로 들어가면 진흙 정원이 있을 것이다. 지지, 이런 곳에서 놀면 더러워지잖아. 이곳은 우리 집이 아니니까 얼른 나가자.

 

세상 어디에도 우리 집은 없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아이의 발자국이 여자의 주위를 돌며 찍힌다. 저 아이의 전부가 그녀에게 슬픔의 전부를 던져준다.

 

거실 소파에서 집주인은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그의 손을 묶고 입속에 진흙을 쑤셔 넣었다. 자신이 죽이던 벌레처럼 사소하고 무의미하게 꿈틀거리는 그를 본다.

 

그때 말이야. 그 배우가 무대를 박차고 나가지 않았다면 계속 행복했을까?

 

정원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검붉은 나무들이 자라는 계절이 지나면, 아이는 집주인을 잊고 나를 엄마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여자는 아이를 안고 나오지 않는 젖을 물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라난 나무들이 집 안을 가득 채웠고, 아이를 보듬고 잠이 든 여자의 얼굴은 마지막 잠처럼 평온하다.

 

몇 날 며칠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누구도 텅 빈 집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계간시로 여는 세상2021년 봄호 발표

 

 


 

 

박은정 시인 / 밤의 무늬 속으로 준비된 천사처럼

 

 

흰 눈이 날리는 봄날입니다

모든 것이 꿈속에서 꾸는 현실 같아

눈을 뜨면 꿈을 꾸는 한낮입니다

여기서 느끼는 감정은 고꾸라지거나

엎드려 구걸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나를 불러내는 경적음이 첫인사입니다

죽은 이들과 밤새 안부를 나누고

살아있지만 죽어가는 이들과 저녁을 향해

달아납니다 멈추면 끝이니까요

여유로운 발코니가 보이고

테이블 위에는 차와 쿠키가 있습니다

자매는 말없이 마주 앉아

서로의 마른 목을 축여 줍니다

갈증이 깊어갈수록 계절은 아지랑이처럼

수국이 자라고 열매가 익어갈 테지요

간밤의 운명을 가방에 챙겨 넣고

자매는 사이좋게 계단을 내려갑니다

학교에는 가지 않아요 배울 것이 없는

악랄하고 후미진 장소는 많으니까

에스컬레이터처럼 움직이는 계단을 따라

낯선 마을에 도착한다면 자매는

돗자리를 깔고 도시락을 먹습니다

수업 종이 울리지 않는 이곳에는

붉은 저수지가 펼쳐져 있고

곳곳에 이름 모를 어둠들이 만발하여

누구도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을 속삭이며

자신의 얼굴을 상상하며 숲길을 걷습니다

어둠이 백지라면 새벽이 성전이라면

자매는 팔짱을 끼고 춤을 춥니다

러시아 밀롱가의 여자들처럼

더운 입김을 비명처럼 내뱉으며

서로의 슬픔이 스며든 주름진 곳으로

나무가 잎새를 지우고 잎새가 꽃을 지우는 곳으로

죽음을 잊기 위해 어디든 떠납니다

주머니에 든 부적을 만지작거리면

두 손에 번져 나오는 검붉은 이름들

발목을 붙잡는 애정 어린 부름들을 뒤로하고

자매는 꿈속의 고독으로 들어갑니다

아름다운 공작새처럼 꿈의 영매가 되어

꼬리를 펼치고 밤의 무늬 속으로

준비된 천사들이 걸어갑니다

 

계간시와 사상2021년 가을호 발표

 

 


 

박은정 시인

1975년 부산에서 출생. 창원대학교 음악과 졸업. 2011시인세계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문학동네, 2015)밤과 꿈의 뉘앙스(민음사, 2020)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