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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성은주 시인 / 흙의 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9.

성은주 시인 / 흙의 말

 

 

연필을 꺼내 깎는다

칼이 밀어내는 속도만큼

구름이 잘려 나가고

비가 떨어지고

헤어진 연인이 선물해준 우산을 펼쳐 든다

발이 닿는 곳마다 흙냄새가 난다

먼 곳에 씨를 심었다가 짝을 못 틔운 일이 있다

오래전부터 자라고 있던 손톱처럼

깊게 파고든 뿌리가 흙을 조용히 더듬는다

한 장 한 장 잎을 넘기다가

차례로 통과하는 세계에 밑줄이 생긴다

가지 끝에 매달린 유일한 증거가 열린다

과수원에서 방금 도착한 사과를 씹는다

말의 씨를 삼킨다

흙에서 흙으로 전해지는 맛

팔짱 끼고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는 사람들

하나의 반죽 덩어리가 되어

유난히 말이 많아지는 날이 있다

 

-계간 포지션 2019년 겨울호

 

 


 

 

성은주 시인 / 물의 방

 

 

덜 외롭고 싶어

물방울들이 모였다

그 방에서

우린 앵무새를 키우고 싶었다

책 모퉁이를 접고 바쁘게 움직이지 않았다

무거운 가방을 잠시 내려 놓았다

날마다 뛰어든 물의 방,

따뜻했다

여럿이 오래 머물렀다

밖에 비가 그쳐도

서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

같이 살을 맞대고

땀 흘리는 물방울의 이마를 만졌다

물방울은 눈물방울이 되었다

누군가 컵을 가져 왔고

모두 따라 버렸다

빈 방이 되었다

 

-계간 시인 수첩2019년 겨울호

 

 


 

성은주 시인

1979년 충남 공주에서 출생. 한남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 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박사과정. 201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현재 웹진 시인광장편집장으로 활동 . 현재 한남대학교 초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