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주 시인 / 흙의 말 연필을 꺼내 깎는다 칼이 밀어내는 속도만큼 구름이 잘려 나가고 비가 떨어지고 헤어진 연인이 선물해준 우산을 펼쳐 든다 발이 닿는 곳마다 흙냄새가 난다 먼 곳에 씨를 심었다가 짝을 못 틔운 일이 있다 오래전부터 자라고 있던 손톱처럼 깊게 파고든 뿌리가 흙을 조용히 더듬는다 한 장 한 장 잎을 넘기다가 차례로 통과하는 세계에 밑줄이 생긴다 가지 끝에 매달린 유일한 증거가 열린다 과수원에서 방금 도착한 사과를 씹는다 말의 씨를 삼킨다 흙에서 흙으로 전해지는 맛 팔짱 끼고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는 사람들 하나의 반죽 덩어리가 되어 유난히 말이 많아지는 날이 있다 -계간 《포지션 2019년 겨울호 성은주 시인 / 물의 방 덜 외롭고 싶어 물방울들이 모였다 그 방에서 우린 앵무새를 키우고 싶었다 책 모퉁이를 접고 바쁘게 움직이지 않았다 무거운 가방을 잠시 내려 놓았다 날마다 뛰어든 물의 방, 따뜻했다 여럿이 오래 머물렀다 밖에 비가 그쳐도 서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 같이 살을 맞대고 땀 흘리는 물방울의 이마를 만졌다 물방울은 눈물방울이 되었다 누군가 컵을 가져 왔고 모두 따라 버렸다 빈 방이 되었다 -계간 『시인 수첩』 2019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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