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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혜경 시인 / 백석동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9.

조혜경 시인 / 백석동

 

 

껍질 밖으로 걸어 나간 사람을

시인이라 부르는 곳에서

삽니다

살아보니 살아집니다

나를 기르던 목자牧者 떠났지만

소라아파트 그대로입니다

고동 안에 든 살갗. 오직 내 것이라고

껍질을 긁으며 울다 보면

기도하던 손이 퉁퉁 부어오릅니다

소라아파트를 다 읽고

천국에 가고 싶습니다. 괜찮나요?

읽고 잠들고 깨어나고 다시 읽고

변할 수 없는 물질을

철학자들이 이야기할 때

그 페이지에 저는 가만히 멈춰 있었습니다

변해야 물질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소라아파트에서의 1113일은 추웠습니다

소라아파트에서의 1114일은 역시 추웠습니다

껍질 밖으로 걸어 나간 사람을

생각합니다

생각하다 생각만 하다 터널 속에 사는 사람처럼

오늘 밤에는 캄캄한 기도를 하겠습니다

터널 벽을 만져봅니다

머릿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잠을

다시 청하겠습니다

오래 무릎 꿇고

나에게 돌아오라며

까만 벽을 두드리겠습니다

 

-시집 <그 오렌지만이 유일한 빛이었네>에서

 

 


 

 

조혜경 시인 / 몽블랑 기차

 

 

밤은 더 까맸다

바람을 쥐고 잠든 소녀들 싣고

달리는

샤이니- 스위스- 스위스 - 샤이니

우린 서로 차갑고 따뜻하다

 

하얀 돌 위에 흩뿌리는 보라, 송이, 가루

멀리 가지 마, 멀리 가

부르르 떨며 사라지는, 찢어지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찢어진 책, 물에 불은 책

너는 책 속에 잠들어 있고

쏟아버린 말들에게 목줄을 매어 줘

사라지는, 멀어지는

서른다섯 권의 보라, 스물세 자루의 송이

 

모두 떠나보낸 강물을 타고

마켓에서 판매되는 얼음과 전나무 숲

베고 누워 조용히

샤이니 스위스 스위스 - 샤이니

꽁꽁 얼어 떠다니는 꿈을 주머니에 넣고

 

울지 마, 울지 마 몽블랑

멀리 가지 마, 멀리 가 몽블랑

웅크린, 잦아드는 몽블랑

찢어진, 물에 불은 몽블랑

서른다섯 권의 몽블랑

스물세 자루의 몽블랑

 

 


 

 

조혜경 시인 / 바람의 취향

 

 

 나 한때 바람을 좋아했죠 바람 없는 <스노우 볼> 속의 하루는 심심하죠 폭동도 소요도 없는 그 곳을 나는 좋아하지 않아요 아버지도 바람을 좋아했죠 나뭇잎을 흔들고 가는 바람 구름을 흩어놓고 가는 바람 때론 지붕을 걷어가는 바람 바람은 오늘 내 눈동자 안에서 불어요 상쾌한 씨눈을 숨긴 채 유리창을 넘고 담장을 넘고 태평양도 건너지요 바다 깊숙이 들어가 고래가 된 사나이의 이야기도 바람결에 들었죠 사내의 척추에 숨어든 숨결이 물방울 타고 해초 타고 결국 수돗물을 타고 우리 사무실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은 그 바람을 못 본 척해요 하지만 콧등에 귓속에 옷자락을 감추고 퇴근하죠 그들은 집에 들어가지 않아요 거리엔 스카프가 날립니다 콧노래가 날립니다 높은 빌딩의 허리가 살짝 휘었다 돌아옵니다 한강 위 철교가 잠시 출렁입니다 아버지는 바람을 좋아했죠 그 바람이 아버지를 좋아했죠 당신들 눈 속에서 천천히 조그맣게 둥근 원을 그리며 돌고 돌고 또 도는 바람이 한때 나를 좋아했죠

 


 

조혜경 시인

1967년 강원도 철원에서 출생. 2012년 여름호 서정시학신인상으로 등단. 2013년 젊은시 (문학나무) 수록. 시집 그 오렌지만이 유일한 빛이었네. 2020년 전북문화관광재단 문예진흥기금 수혜자로 선정. 전주대 간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