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숙 시인 / 휴대폰 젊은 메시지는 가고 늙은 메시지가 뜨겁다 휴대폰의 메모리와 메모리 사이 섬세한 회로의 연결고리를 이어가는 심장의 메시지들이 빠르게 솟구친다 메시지의 궤도이탈이 시작되며 전파가 흐르는 하늘도 뜨겁다 레이더망에 걸려 넘어지는 메시지들 판도라 밑바닥의 희망을 찾아 나서는 내 사랑 김희숙 시인 / 발묵潑墨 밀밭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휩쓸린다 흩뿌려진 씨앗들은 휩쓸리는 풍경이 된다 한 번씩 밀려왔다 밀려갈 때마다 푸른색을 버리고 누르스름한 색을 묻혀오는 바람 타고 노는 것이다 밀밭 위쪽으로 붉게 노을이 밀려와있다 붉은 발묵潑墨으로 번져있다 밀밭 위 하늘은 간지러운 것이다 누렇게 익은 껍질 속에는 터질 듯 흥분이 숨어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 껍질 속에는 젓가락 반기는 국수가 들어있고 노릇노릇 빵이 들어있다 검은 먹 갈다 잠든 어릴 적 같다 고조부는 하늘에 살짝 먹을 스쳤을 뿐인데 얼룩진 노을 저편 둥그런 하늘의 귀퉁이마다 번져 나오는 발묵潑墨 밀밭 끝이 까끌까끌하다 끼니는 다 저렇게 까끌까끌한 것들에서 나온다 가끔 입 안이 까끌까끌한 것도 까끌까끌한 세상에서 지친 바람 탓이다 여름, 몇 번의 발묵潑墨이 번져 갔으나 변변한 묵화 한 점 건지질 못했다 판 걷어치우고 나면 뭉쳐서 집어 던진 화선지 몇 뭉치 여전히 하늘에 뭉게뭉게 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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