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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성은 시인 / 올란도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5.

강성은 시인(의성) / 올란도

 

 

내가 아는 사람들 모두가 죽었다

몇 세기에 걸쳐 꿈을 꾸었다

수많은 계절들의 반복과 변주

수많은 사람들의 반복과 변주

어제와 내일의 경계가 사라지고

여성과 남성의 경계가 사라져도

이 꿈은 사라지지 않아

죽기 위해 절벽에서 몸을 던지면

다음 생이 시작된다

너는 누구지? 너는 누구야?

밤이 저 오랜 질문을 던지고

슬그머니 얼굴을 바꾸면

다음 날이 시작된다

너는 누구지? 너는 누구야?

몇 세기에 걸쳐 떨어져 내리는 낙엽들

나의 노래들이 켜켜이 쌓여간다

나의 얼굴들이 켜켜이 쌓여간다

이 오랜 꿈이 끝나고

나 자신이 희고 빛나는 밤이 될 때

이것이 어떤 잠이었는지 알게 되리

 

 


 

 

강성은 시인(의성) / 당신은 계속 멈춰 있다

 

 

드라마를 보다가

주인공들이 모두 죽어버렸다

 

다음 시즌을 보면

모두 살아 있어

 

누가 태엽을 감아 주었을까

 

한 덩이 세탁비누가 사라졌다 다시 뭉쳐질 때까지

교복에 묻은 피를 지우고 있는 소녀에게도

 

밤의 도로 위에서 벌떡 일어나

오토바이를 찾는 배달원에게도

 

벽장 속에 숨어 있는 부끄럼이 많은 유령들에게도

오래도록 태엽을 감아 주고 싶은데

 

어느 날 아침 현관문을 열면 내가 아홉 살 때 잃어버린 장난감이

문 앞에 도착해 있어

(어디 갔다 왔니)

마치 어제 집을 나갔다 돌아온 것처럼

반겨 줄 아이를 본다

 

태엽을 감는 손

태엽 감기를 잊은 손

 

생각에 빠졌다

한 아이가 다른 아이가 되는 동안

 

 


 

 

강성은 시인(의성) /

 

 

닭장의 닭들이 모두 얼어 죽었다

닭장의 유령들은 희미한 볏을 흔들고 있다

가족들이 모두 얼어 죽었다 집 안에서

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고요하다

 

곰과 뱀과 고슴도치는

잠이 오지 않는 잠 속에서

배고프다 춥다

 

장끼와 까투리가 눈밭을 걸어와

배고프다 춥다

닭장 속으로 들어갔다

 

눈 위에 발자국이

발자국 위로 눈이

배고프다 춥다

 

집으로 들어갔다

 

 


 

 

강성은 시인(의성) / 허기의 집

 

 

빵이 담긴 바구니 안에 구렁이가 잠들어 있다

 

생각에 잠긴 여자가 비누를 문지른다 거품이 부풀어 오른다 점점 크고 둥글게 여자의 손에서 시작된 거품이 여자를 집어삼키고 여자는 그대로 멈춘 채 영원히 어딘가에 갇힌다

 

탐욕스럽게 시럽을 퍼먹던 아이가 떨어뜨린 얼룩 곳곳에 떨어져 있다 아이의 입가에 식탁에 바닥에 벌들이 날아와 아이를 둘러싸고 아이는 입속으로 들어간 벌들을 오래 씹는다

 

생각에 잠겨 있던 남자를 고양이가 할퀸다 보이지 않는 고양이를 잡으려고 남자가 팔을 휘두른다 고양이의 발톱도 보이지 않고 고양이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고양이를 잡으려고 휘두르는 팔은 상처로 가득하다

 

생각에 잠기는 건 위험한 일이지

식탁에 앉으렴 얘야

오늘 새로 생긴 부위를 잘라 줄게

어제 잃어버린 부위에 돋은 새살이란다

 

어둠이 입을 다물지 않는다

 

빈 집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강성은 시인(의성)

1973년 경북 의성에서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 숙명여대 불문과. 2005문학동네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2018년 제26회 대산문학상 시부문 수상.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단지 조금 이상한』 『Lo-fi』 『별일 없습니다 이따금 눈이 내리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