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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차현주 시인 / 유자와 유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5.

차현주 시인 / 유자와 유자

 

 

유자 옆에 유자. 유자끼리 하는 사랑. 같은 유자여서 아무도 믿지 않는다.

 

유자끼리 뭉쳐 있으면 보기 좋지 않으니 적당한 과일과 섞여 놀거라, 관상을 보는 사람이 말한다.

 

유자는 사과와, 유자는 키위와, 빨노초파 섞여야 과일 바구니가 풍성해진다, 세일즈맨이 말한다.

 

유자끼리 모여 있지 못하게 떼어 놓는 손가락. 긴 바나나를, 혹은 머리가 큰 파인애플을 유자 사이에 섞어둔다. 그게 과일의 오랜 보존을 위해서도, 건강한 과일 간 유대를 위해서도 더욱 좋다고 말하는 과일 학자

 

유자는 유자일 뿐. 유자는 유자 옆에, 유자는 유자의 베개에 누워 있다.

 

유자는 유자랑 있고 싶다. 유자가 사랑하는 것은 오직 유자뿐. 노랑 옆에 노랑. 노란 것끼리 뭉쳐 있으면 식욕에 좋지 않다고 하는 미식가를 끝으로, 자꾸 사랑이라고 말하는 유자를 꾸짖는 사람이 많다.

 

유자 옆에 유자. 압도하는 노랑. 눈부신 노랑에 놀란, 관상가과일학자미식가 등

 

자발적으로 굴러 착석하는 노랑이다. 주머니 밖으로 손잡는 노랑이다. 유자 옆에 유자 있다. 유자 옆엔 역시 유자가 있다. 우정이라고 불러도 너그럽게 사랑이라고 발음을 고쳐주는 유자들

 

계간 다층2022년 봄호 특집 발표

 

 


 

 

차현주 시인 / 믿음에 관한 에피소드

 

 

따뜻한 손이 어미 소의 새끼를 받았습니다

그 손이 방금 목을 졸랐습니다

궁둥이를 귀엽게 두드리다 뺨을 후려쳤습니다

축 경사

세상에, 소중한 생명이 또 탄생했습니다

곧 이 생명도 따뜻한 손이 될 것입니다

 

따뜻한:

안락한 말입니다

지하철 의자에서는 언제나 졸았습니다 목적지를 잊고 돌아버렸습니다 누군가의 품에서 잠이 깨면 1년씩 지났습니다 따뜻한 물로 샤워하다가 학교에 못 갔습니다

 

차가운 손발은 따뜻한 마음의 다른 말입니다

당신의 수족이 되느라 차가워진 것이니 이 마음을 거두어 주세요

내 마음을 확인하려거든 가슴 안으로 손을 넣어주세요

언제나 품고 다니던 차가운 가위

베인 손가락에선 따뜻한 피가 흐를 테지요

이제 따뜻해진 가슴이겠습니다

 

오늘의 사건사고는 지루합니까?

당신의 상의를 들춰보면 더 재밌을 텐데요

팝콘을 들고 언제 다 같이 한번 관람을……

목구멍을 크게 벌려 가글을 하세요

티 나지 않게 앞사람의 머리카락을 한 올씩 뽑아버리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따뜻한 말:

기대다가 나를 찌를 못입니다

그립고 따가운 송곳입니다

 

계간 다층2022년 봄호 특집 발표

 

 


 

 

차현주 시인 / 유령

 

 

꿈에서는 발이 없었는데, 가고 있었다

공이어서 걷거나 뛰지 않고 가는 것만 있었다

공이었는데, 꿈이어서 잠이 없었다

잠을 자지 않고 계속 갈 수 있었다

 

너는 죽었는데, 살고 있다

꿈도 아니고 공도 아닌 너는 사라져도, 살고 있다

너로 산 적 없어서 너를 잃어도 계속 살아진다

 

자다 깨보니 꿈인 공과

발 없이 방향 없이 다만 굴러가는 공 사이에서

너는 갈등한다 무엇을 먼저 죽일지

자신이 죽었는지도 모른 채,

 

계간 다층2022년 봄호 특집 발표

 

 


 

차현주 시인

1986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2021서정시학여름호 신인상을 통해 등단. 현재 웹진 시인광장편집위원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