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영 시인 / 숯 사라졌다가 다시 태어나는 태양과 달과 별처럼 이 검은빛 덩어리가 품고 있는 나무의 혈관 불의 씨앗 멈춰선 맥박 위에 삶을 얹으면 저렇게 순식간에 불의 덤불이 우거질 줄을 당신은 진정 몰랐단 말인가요? -시집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에서 박서영 시인 / 점자책 흰 종이의 땅을 뚫고 출토된 글자들이 방울방울 솟아 있다 이 책은 어둠을 켜놓고 읽어야 한다 무색무취 글자의 근육 제대로 서 있을 수 없는 글자들은 조금 쭈르기고 앉아 있기도 하다 후각과 청각과 시각과 미각을 열고서도 마음의 감각까지 동원해야 차가운 너의 몸을 만질 수 있다 이것이 눈송이 같은 너의 몸을 다치게 하지 않는 방법이다 나는 어두워지면 불을 켜는 습관이 있어 영원히 이 책을 읽지 못하리라 어둠을 켜놓고도 환한 세계의 한 공간을 내 몸이 엿볼 수 있다면 아, 눈보라가 휘날리던 바람 찬 흥남부두* 같은 책 한 권을 나는 읽을 수 없다. *<굳세어라 금순아>에서 빌림 -시집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에서 박서영 시인 / 상실 잃어버린 것들을 수확하는 밤이 온다 뿌리째 뽑혀 올라온 슬픔에는 아흔아홉의 꼬리가 달려 있다 아흔아홉의 꼬리가, 바람이 끌고 간 것들이 돌아오는 밤 그들은 어디든 가고 어디든 가지 않는다 그들은 끝없이 잃고 또 끝없이 얻는다 저 단단한 보도블록 안에 숨겨 놓은 추억이 있듯이 우리는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 아흔아홉의 꼬리를 흔들며 기억이 지워진다 치매처럼 잃어버린 기억들이 끌려 올라온다 순간을 얻고 백 년을 잃는다 천 년을 얻고 백 년을 잃은 채 돌아오는 시간으로 나는 또박또박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나는 또박또박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 덴마크 동화 「가난한 사람을 돕는 냄비」와 어원의 시 「어느 길에 대한 또박또박하고 뚜벅뚜벅한 코드」에서 빌림. -시집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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