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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서영 시인 / 숯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6.

박서영 시인 /

 

 

사라졌다가 다시 태어나는

태양과 달과 별처럼

이 검은빛 덩어리가 품고 있는

나무의 혈관

불의 씨앗

 

멈춰선 맥박 위에 삶을 얹으면

저렇게 순식간에

불의 덤불이 우거질 줄을

 

당신은 진정 몰랐단 말인가요?

 

-시집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에서

 

 


 

 

박서영 시인 / 점자책

 

 

흰 종이의 땅을 뚫고

출토된 글자들이 방울방울 솟아 있다

 

이 책은 어둠을 켜놓고 읽어야 한다

무색무취 글자의 근육

제대로 서 있을 수 없는 글자들은

조금 쭈르기고 앉아 있기도 하다

 

후각과 청각과 시각과 미각을 열고서도

마음의 감각까지 동원해야

차가운 너의 몸을 만질 수 있다

이것이 눈송이 같은 너의 몸을

다치게 하지 않는 방법이다

 

나는 어두워지면 불을 켜는 습관이 있어

영원히 이 책을 읽지 못하리라

어둠을 켜놓고도 환한 세계의 한 공간을

내 몸이 엿볼 수 있다면

 

, 눈보라가 휘날리던 바람 찬 흥남부두* 같은

책 한 권을 나는 읽을 수 없다.

 

*<굳세어라 금순아>에서 빌림

 

-시집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에서

 

 


 

 

박서영 시인 / 상실

 

 

잃어버린 것들을 수확하는 밤이 온다

뿌리째 뽑혀 올라온 슬픔에는

아흔아홉의 꼬리가 달려 있다

아흔아홉의 꼬리가,

 

바람이 끌고 간 것들이 돌아오는 밤

그들은 어디든 가고 어디든 가지 않는다

그들은 끝없이 잃고 또 끝없이 얻는다

저 단단한 보도블록 안에 숨겨 놓은 추억이 있듯이

우리는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

 

아흔아홉의 꼬리를 흔들며 기억이 지워진다

치매처럼 잃어버린 기억들이 끌려 올라온다

순간을 얻고 백 년을 잃는다

천 년을 얻고 백 년을 잃은 채 돌아오는 시간으로

나는 또박또박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나는 또박또박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 덴마크 동화 가난한 사람을 돕는 냄비와 어원의 시 어느 길에 대한 또박또박하고 뚜벅뚜벅한 코드에서 빌림.

 

-시집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에서

 

 


 

박서영 시인(1968~2018. 2. 3)

1968년 경남 고성에서 출생. 1995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천년의시작, 2006)좋은 구름(실천문학사, 2014)이 있음. 3회 고양행주문학상 수상, 웹진 시인광장 객원 편집위원 역임. 20182월 지병으로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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