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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경교 시인 / 붉은 책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8.

이경교 시인 / 붉은 책

 

 

나는 펼쳐진다 파도소리 스며있는 머리말을 지나며

바다에 빠진다

 

갈매기 눈망울엔 물고기가 비친다

 

황하의 대범람이나 몽골제국의 아랍통치 이전부터

나는 새겨졌으며, 구운 빵처럼 몸이 부풀었다

 

나는 확장된다, 부드러워지고 깊어진다

달빛 촘촘히 너의 솔기마다 스며들 때

나는 떨린다, 마파람 앞에서

이 떨림도 누군가에겐 운명을 흔드는 태풍 같아서

나는 잠시 머뭇거린다

 

1장을 지나면 지중해 푸른 바다, 누군가

나를 떠메고 해안선을 지날 때, 보아라

모래의 잠든 눈꺼풀 아래 낙서 같은 활자들

스쳐가고

 

나는 지금 중세를 막 지나왔다 꼬리 흔들며

물고기들은 어디로 가는지, 발이 부르튼 별빛 아래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젖은 꽃잎과 먹장구름을 지나, 새로운 세기까지

잠든 네 이마에 꽂히는 번갯불 위에

 

나는 겹친다

 

 


 

 

이경교 시인 / 초승달

 

 

다시 중세의 저녁, 술탄의 망루 아직 환하다

쪽거울을 본다 아니, 자장에 이끌린 검은 새

흰 그림자다

 

나는 사산 왕조가 기울 무렵 페르시아를 떠난 왕자

홀로 쪽거울 테두리 두드리고 있었는데, 놀라워라

타악의 울림 숲을 흔들어 물방울 악보 허공에

흩뿌려진다

 

어디로 출항하려는 걸까 등이 휜 저 선박들

아직도 아랍 국기 위에 정박해 있다

애초 내가 기다린 건 선박이 아니라

몸이 젖은 채 생각만 환해진 새

 

검은 새 흰 눈썹 파르르 떨린다 여기는 허공중의

허공, 텅 비어 북소리 울리는

저 소리는 내 안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오래 전부터 나는 부풀고 가려웠으며 몸이

붕붕, 뜨기도 한다

 

짝눈으로 술탄의 망루 내려다보는 저녁

 

 


 

 

이경교 시인 / 다시, 해변의 장밋빛 정원

 

 

 들창을 기웃거리는 사이, 지상에서 가장 긴 몇 분, 잠시 정지한 시간이 해안선에 걸려있다 시간도 고삐가 풀리면 일제히 넘어질 때 있으니 거리를 재다가 고백하지 못한 말, 해일처럼 밀려 와 둑방 터질 때, 세월은 물결에 휩쓸리고

 

 지상에서 가장 길었던 장밋빛도 흘러, 누군가 소리없이 방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긴 망또를 끌고 와 해안선에 지친 등을 기대는 것이다

 

 들창 닫힌 어둠 속에서, 조용히 신의 용서를 빌 때

 

 이 정원에서 과거란 다만, 불빛 꺼진 담장의 안쪽이거나 장밋빛이 지워지는 거리라고

 

시집 모래의 시(2011)에서

 

 


 

이경교 시인

1958년 충남 서산 출생. 동국대 및 같은 대학원 국문과에서 문학박사 학위. 1986월간문학신인상 당선. 시집 이응평전』『꽃이 피는 이유』 『달의 뼈』『수상하다, 모퉁이』 『모래의 시』 『목련을 읽는 순서저서 한국현대시 정신사』 『북한 문학강의. 수상록 향기로운 결림』 『화가와 시인』 『낯선 느낌들』 『지상의 곁길, 역서 은주발에 담은 눈. 현재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