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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경인 시인 / 그레텔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8.

김경인 시인 / 그레텔

 

 

숲에 갔다

 

아버지가

하룻밤 내내 만들어준

흰 빵을 찢어 버리면서

검은 돌처럼 구르면서

 

나뭇가지처럼 뻗어가는 길과

나를 안고 달리다가 쓰러진 길이

안 보일 때까지

 

무너지지 않는 집을

크래커인 양 이빨로 부스러뜨리면서

짙은 어둠으로 만든 지붕을

다크초콜릿처럼 핥으면서

 

집으로 가는 길을 영영 잊어버릴 때까지

 

내 속에서 꺼낸 낯익은 얼굴 하나

푹 고아서 흐물흐물 사라질 때까지

 

 


 

 

김경인 시인 / 나는 오늘 고통스러웠으나 애쓰지는 않았어*

 

 

창문 안에는 무엇이든 쉽게 읽을 수 있지

자욱한 밤이 통유리에 흘리고 간 진물과

관상용 화초처럼 가만 두어도 푸르게 자라나는 풍경을.

네모진 창틀에 떨어진 부스러기 말을

하얀 두부처럼 뭉쳐 모양 좋게 부치면서,

얘야, 세상에는 이런 일도 있는 거란다.

운이 좋으면 팔릴 수도 있는 누군가의 불행과

창문이 남몰래 흘린 눈물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지

그렇단다. 얘야.

바퀴 아래서 흩어진 작은 물방울을 닮은 심장이나

이웃의 지붕을 부수고 영영 주저앉은 슬픔에 대해서도

그러니까 창문 안에서는 무엇이든 쉽게 말할 수 있지

인생의 고독한 오후와

아스라이 어둠으로 빨려드는 황혼에 대해

지극히 서정적인 고통에 대해.

 

오늘 창문에는 무지개가 걸려 있었지

물결치는 무지개의 행렬이 창문을 넘어

네 얼굴을 어지럽게 물들였지

나는 그저 쉽게 말했어

모두 다른 눈송이들의 빛깔과 모양에 대해

눈보라처럼 사방에서 거세게 몰아치는 사랑의 각각 다른 모양에 대해

우리의 창문 너머에서 벌어지는 아름다운 소음에 대해.

두꺼운 이중 창문 앞에서

너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어

긴 여행을 끝낸 승객이

지상에 처음 발을 내딛듯이

시작이 곧 끝인 그런 이야기를

실은, 엄마, 나는...

나는 애써 웃었지

그런데... 엄마... 내가 만일

누군가를... 사 라 ㅇ

나는 창문에 커튼을 치고

,

얘야, 무지개는 멀리서 볼 때만 아름다운 거란다.

나의 그림자를 일으켜

창문 앞에 보초 서듯 세워 놓았지

그리고 나는 다정한 얼굴로

일곱 개의 돌을 단단히 뭉쳐서

네 한복판에 힘껏 던지고야 말았지

 

*에밀리 브론테, '나는 하루 종일 애썼으나 고통스럽지는 않았어 하루 종일 애썼네.

 

- 월간 현대시20221월호, 신작특집에서

 

 


 

김경인 시인

1972년 서울 출생. 가톨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2001문예중앙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한밤의 퀼트얘들아, 모든 이름을 사랑해』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가 있음. 2011년 제1회 시인광장 시작품상 수상. 현재 한양대학교 에리카캠퍼스 창의융합교육원 교수로 재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