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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수현 시인 / 무한계단육면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7.

박수현 시인 / 무한계단육면체

 

 

계단들이 여기저기 장마 끝 푸성귀처럼 웃자라고 있다

무릎에 철심을 박고 나사를 조인 뒤부터

계단을 밟는 게 허공을 밟는 듯 오금이 저린다

돌아보면 세상은 계단의 참혹한 식민지다

동네병원부터 지하철 마트며 뒷산 산책로까지

나는 밀실에 숨은 채 등사기를 돌려

전단지를 찍는 비장한 레지스탕스는커녕

식민지의 적자(赤子)가 되어 무참하게 굴복한다

난간에 기댄 채 심장이

간이 마구 오그라드는 듯하다

그러니까 정작 복합골절을 당한 쪽은 무릎이 아니라

내 애먼 심장이나 간 어디쯤일 성싶다

층층 계단 어차피 계단 삐꺽 계단 다짜고짜 계단

나는 계단을 오르는지도 내리는지도 모르고

계단참에 껌딱지처럼 물끄러미 달라붙은 채로 서 있다

나는 무작정 펼쳐진 악보의

참 서러운 도돌이표가 된 게 틀림없다

 

여기까지 생각하는데 갑자기

가로세로 계단들이 아코디언처럼 촘촘히 접혔다가

수평선처럼 쭈욱 펼쳐지더니

월식 때 달이 지구그림자에 가리듯이

담배가게 옆 골목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반년간 『​서정과 현실2022년 상반기호 발표

 

 


 

 

박수현 시인 / 예후豫後

 

 

두 발을 부려두고 왔지요 칼과 가위의 고요도 놓고 왔습니다 눈과 얼음의 흰 바다를 유영하던 기억을 접어둔 채, 꼭 스무 날의 불면도 생각지 않기로 했지요 늘 북쪽으로부터 눈보라가 쳤습니다 내 몸의 기상도氣象圖 곳곳을 침략하며 발호하는 한랭전선 그랬어요 통증은 겨울자객처럼 다가와 내게 짐승의 자세를 취해보라고 집요하게 속삭였지요 나는 서랍 속 미제사건의 파일처럼 점점 어둠에 익숙해졌습니다

 

어느 손길이 내 전신인 흉터의 어둠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니들 홀더가 꿰맨 수술 자국에서 밤마다 물결치는 소리가 수도꼭지의 누수漏水처럼 새나왔습니다 갯지렁이들도 농게 새끼들도 슬개골을 따라 기어다닙니다 까마득히 몰려오는 파도가 휠체어에 앉은 내 어둠을 내습來襲하네요 나는 하얀 소용돌이 속에 처박히며 비명을 지릅니다 그리고 그저 폐선처럼 표류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침이 오면 내 전신의 어둠은 어느 해안에서 좌초되어 있을까요

 

계간 시와 소금2021년 겨울호 발표

 

 


 

박수현 시인

1953년 대구에서 출생. 경북대학교 사범대 영어과 졸업. 2003년 계간시안으로 등단. 시집으로 운문호 붕어찜 』 『복사뼈를 만지다』 『샌드페인팅등이 있음. 2011년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창작기금 수혜. 2020년 제4회 동천문학상수상. '溫詩' 동인. 시안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