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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정란 시인(상주) / 숨죽여 우는 사람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7.

최정란 시인(상주) / 숨죽여 우는 사람

 

 

어딘가 닿겠지요 닿지 않으면 어때요 자갈길, 흙길, 모랫길, 풀밭길, 길 위의 시간이 길어요 좁은 길, 불면을 부르는 길, 슬픈 일이 눈을 가득 채우는 길, 작은 골목과 거리와 바닷길, 산길, 들길을 오래 걸어요 우울과 명랑이 뒤섞인 길을 걸어요 슬픈 일은 일기에 숨기고 기쁜 일만 겉으로 꺼내 놓아요 일찍 철든 유쾌한 사람으로 비친다면, 그건 순전히 슬픔과 우울을 빨아먹은 언어 덕분이지요 눈물이 우리 삶을 고귀하게 만든다는 말일까요 떨어진 눈물자국은 왕관 모양이고요 나는 우는 사람, 다시 우는 사람, 혼자 통곡하는 사람, 누군가 들을까 숨죽여 우는 사람일까요

 

 


 

 

최정란 시인(상주) / 소녀들이 소풍을 가요

 

 

자전거를 타고 소풍을 가요 챙이 큰 흰 모자를 쓰고 소풍을 가요 김밥을 싸고 흰 운동화를 신고 자전거를 타고 소녀들이 소풍을 가요 어떻게 아이가 생기는지 모르면서 아이를 품은 소녀가 소풍을 가요 돗자리에 둘둘 말린 소녀가 소풍을 가요 날아오는 돌에 멍이 든 소녀가 소풍을 가요 어제저녁 엄마 제사상을 직접 차린 소녀가 소풍을 가요 내일이면 야반도주할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싣고 소풍을 가요 의자와 침대에 앉아 제각기 따로 첫날밤을 보내게 될 소녀가 소풍을 가요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바다를 건너 소풍을 가요 아무도 소녀들을 아프게 할 수 없는 땅으로 소녀들이 소풍을 가요 소녀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일은 소풍, 소녀들이 소나무 숲을 지나 염소 떼를 지나 소풍을 가요 소녀들이 소풍을 가요

 

 


 

 

최정란 시인(상주) / 사십 계단에서 훔쳐 온 사과

 

 

사과들이 계단을 굴러내려간다

부산타워에서 산복도로로 북항 해변으로

 

깊어지기 전에 좀 웃어요

바닥이 없는 입술들이 서쪽으로 흘러간다

 

수십 개가 한꺼번에 굴러떨어지는 엑스트라들

굴러 내려가는 배역을 맡은 사과들

낱낱의 인지도는 떨어지지만

함께 굴러떨어지는 역할은 유쾌하다

 

감독의 지시에 따라

가파른 이마를 맞대며 통과하는,

계단을 오르는 사과나무 그림자와

계단을 내려가는 사과나무 그림자

 

사과에 얼마나 많은 스펙트럼이 있는지

입은 얼마나 고통스럽게 입꼬리를 치켜올릴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탐구인 것처럼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을 번갈아 꺼내며

빛에서 어둠으로 자리를 옮기는 계단들

열심히 굴러떨어지는 흑백의 사과들

 

어둠의 내부가 빛의 외부로 이어지고

뫼비우스의 것은 뫼비우스에게 돌려주어도 좋을

명도가 낮아지는 밤과

명도가 낮아지는 그림자

하양과 검정으로 얼버무릴 수 없는 시간의 나무상자에서

쏟아지는 사과들

 

머리가 사라지고

목이 사라지고 목숨이, 가슴이 사라지고

허리가 사라지고

사과의 무수한 발은 나타나지도 못하고

빛 속으로 사라진다

 

빛과 그림자가 어긋나는 흑백 계단 아래로

몸과 그림자의 경계를 지우며

치밀한 사과들 허공을 향해 굴러 올라간다

 

감독의 바깥에 사과를 훔치는 마법사가 산다

 

시집 독거소녀 삐삐(상상인, 2022) 수록

 

 


 

최정란 시인(상주)

1961년 경북 상주애서 출생.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졸업. 2003국제신문신춘문예 당선등단. 시집으로 여우장갑』 『입술거울』 『사슴목발애인』 『장미키스』 『독거소녀 삐삐가 있음. 2016년 부산문화재단창작기금 수혜, 2016년 제7회 시산맥작품상 수상, 2017년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 2019년 제19회 최계락문학상 수상. 2020년 제22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웹진 시인광장편집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