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현 시인 / 무한계단육면체 계단들이 여기저기 장마 끝 푸성귀처럼 웃자라고 있다 무릎에 철심을 박고 나사를 조인 뒤부터 계단을 밟는 게 허공을 밟는 듯 오금이 저린다 돌아보면 세상은 계단의 참혹한 식민지다 동네병원부터 지하철 마트며 뒷산 산책로까지 나는 밀실에 숨은 채 등사기를 돌려 전단지를 찍는 비장한 레지스탕스는커녕 식민지의 적자(赤子)가 되어 무참하게 굴복한다 난간에 기댄 채 심장이 간이 마구 오그라드는 듯하다 그러니까 정작 복합골절을 당한 쪽은 무릎이 아니라 내 애먼 심장이나 간 어디쯤일 성싶다 층층 계단 어차피 계단 삐꺽 계단 다짜고짜 계단 나는 계단을 오르는지도 내리는지도 모르고 계단참에 껌딱지처럼 물끄러미 달라붙은 채로 서 있다 나는 무작정 펼쳐진 악보의 참 서러운 도돌이표가 된 게 틀림없다 여기까지 생각하는데 갑자기 가로세로 계단들이 아코디언처럼 촘촘히 접혔다가 수평선처럼 쭈욱 펼쳐지더니 월식 때 달이 지구그림자에 가리듯이 담배가게 옆 골목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반년간 『서정과 현실』2022년 상반기호 발표 박수현 시인 / 예후豫後 두 발을 부려두고 왔지요 칼과 가위의 고요도 놓고 왔습니다 눈과 얼음의 흰 바다를 유영하던 기억을 접어둔 채, 꼭 스무 날의 불면도 생각지 않기로 했지요 늘 북쪽으로부터 눈보라가 쳤습니다 내 몸의 기상도氣象圖 곳곳을 침략하며 발호하는 한랭전선 그랬어요 통증은 겨울자객처럼 다가와 내게 짐승의 자세를 취해보라고 집요하게 속삭였지요 나는 서랍 속 미제사건의 파일처럼 점점 어둠에 익숙해졌습니다 어느 손길이 내 전신인 흉터의 어둠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니들 홀더가 꿰맨 수술 자국에서 밤마다 물결치는 소리가 수도꼭지의 누수漏水처럼 새나왔습니다 갯지렁이들도 농게 새끼들도 슬개골을 따라 기어다닙니다 까마득히 몰려오는 파도가 휠체어에 앉은 내 어둠을 내습來襲하네요 나는 하얀 소용돌이 속에 처박히며 비명을 지릅니다 그리고 그저 폐선처럼 표류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침이 오면 내 전신의 어둠은 어느 해안에서 좌초되어 있을까요 계간 『시와 소금』 2021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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