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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양진기 시인 / 처음처럼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26.

양진기 시인 / 처음처럼

 

 

처음처럼 주세요 처음처럼

돌아가신 신영복 선생님께 한 잔 올리고 싶어

푸른 소주병에 쓰인 글자를 기울이면

처처음럼, 처처음럼

여기저기서 럼주를 따르는

왁자한 선술집으로 들어서지

 

저마다 몸 한 구석에 푸른 기둥을 세우고

가투에서 돌아온 스무 살 우리가 소주를 마시고 있어

물불 가리지 않고

제 몸을 불살라 이루려했던 혁명

스크럼 짜고 전진하던 대오

메뚜기 떼처럼 흩어졌다 다시 모여들던 선술집

탁자 위에 빈 술병은 늘어가고

비틀거리는 새벽으로

혁명은 사라졌고 우리는 희미해졌어

 

누구는 타도를 외치던 정당으로 들어가 정치인이 되고

누구는 매판자본이라고 욕하던 기업체 이사가 되고

이도저도 아닌 우리는 싸구려 술집에 모여

설계할 수 없는 미래를 술잔 속에 빠뜨리고 있어

한 잔을 마시니 스무 살 청년이야

술병을 다 비우면 꿈꾸었던 혁명이 되살아날까

이모, 처음처럼 한 병 더

 

병목에 달라붙은 그녀가 웃고 있어

푸른 입술을 둥글게 말아 속삭이고 있어

움직이는 건 시간이지 사랑이 아냐

죽어도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는 거야

그러니 언제나 처음처럼

천 잔을 마셔도 첫 잔처럼

 

-시집 신전의 몰락』에서

 

 


 

 

양진기 시인 / 서리

 

 

공중을 떠도는 한숨의 기록이다

죽은 이들의 발설하지 못한 유언을 적은 설형문자다

한이 깊어 하루아침에 백발이 된 여인의 머릿결이다

 

냉정한 세상에 서리가 가득하다

원망이 하얗게 달라붙어 풀의 목을 꺾는다

서릿발에 베여 흰 피가 낭자하다

 

창백한 유리창에 귀를 대고

서러운 이의 이야기를 듣는다

얼어붙은 표면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쓰다듬다

입김을 불면 글썽이며 녹아내리는 눈물

 

날이 밝으면 사라지는 영혼

응달 한구석에는

서러운 사연 한 무더기

햇빛에 하얗게 부서지고 있다

 

-계간 『시에』 2017년 가을호, <시와에세이> 에서

 

 


 

양진기 시인

제주에서 출생. 2015년 《리토피아》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신전의 몰락』(2017 세종나눔도서)이 있음. 막비시동인으로 활동 중. 성남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