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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원무현 시인 / 저녁 무렵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26.

원무현 시인 / 저녁 무렵

 

 

저물 녘 해가 미루나무에 걸터앉아 햇살을 헹굽니다

어릴 적 물고기가 빠져나간 손가락사이로 노을,

노을이 올올이 풀려서 떠내려갑니다

누런 광목 천 하나로 사철을 건너신 어머니

어머니께 꼭 끊어드리고 싶었던

비단 폭 같은 냇물을 움켜쥡니다

이제는 밥 짓는 연기가 나지 않는 텅 빈 굴뚝을

우렁우렁 넘어오는 부엉이 울음이 맵습니다

 

 


 

 

원무현 시인 / 옥수수껍질을 벗기며

 

 

잘 익은 옥수수껍질을 벗기면서

한 겹 한 겹 노란 수의를 입혔던 시신을 생각한다

 

옥수수는 껍질을 벗길수록 알맹이의 단단함이 손끝으로 전해오지만

망자는 수의를 한 벌 두 벌 입히면 입힐수록 그의 실체를 드러낸다

 

염의 마지막 의식에 들어 얼굴이 가려지면

내 손끝엔 바늘처럼 꽂혀있던 시신의 싸늘한 체온이 빠져나가고

고스란히 묶은 눈물겨운 한 생의 수확물,

껍질을 벗기지 않은 옥수수처럼 누운 시신에 유족이 오열을 뿌리며

마저 풀지 못하고 한으로 묶어간 매듭을 만진다

망자의 삶이 껍질을 다 벗긴 옥수수처럼 울퉁불퉁 만져진다

 

 


 

 

원무현 시인 / 전시장에 가다

 

 

겨울이 발톱만 살짝 데치고 가는 남도 해운대에

수십 년 만에 눈이 오고 있다

 

가로등이

길 위에 그려 넣자 곧 사라지는 흰 발자국을 읽고 있다

백사장에 흩어진 발자국을 읽기보다 더 난해하다

 

동백나무에 내려앉자 곧 날아가 버리는 흰나비의 자세를 비춰보는 등대

묶여 있는 폐선의 발목을 읽어낼 때보다 더 강렬한 촉광을 쏟아내고 있다

 

괭이갈매기가 흰 똥으로 서둘러 낙관을 찍는다

바닷바람이 재빠르게 달려와 그림을 가져간다

 

해운대가 몇 장의 그림을 물 속에 전시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일출과 일몰을 펼쳐놓는 바다가 있을 뿐이다

  

 


 

원무현 시인

1963년 경북 성주 출생. 2003년 격월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으로 <너에게로 가는 여행> <뒷모습이 아름다운 길을 떠나자> <洪魚(홍어)> <사소한, 아주 사소한> <강철나비> 등이 있음. 요산문학관 사무국장을 역임, 현재 빛남 출판사 대표, (사)아름다운 사람들 사무처장 및 이사, 부산시인협회 이사, 부산작가회의 회원. 부산 크리스천 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