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무현 시인 / 저녁 무렵
저물 녘 해가 미루나무에 걸터앉아 햇살을 헹굽니다 어릴 적 물고기가 빠져나간 손가락사이로 노을, 노을이 올올이 풀려서 떠내려갑니다 누런 광목 천 하나로 사철을 건너신 어머니 어머니께 꼭 끊어드리고 싶었던 비단 폭 같은 냇물을 움켜쥡니다 이제는 밥 짓는 연기가 나지 않는 텅 빈 굴뚝을 우렁우렁 넘어오는 부엉이 울음이 맵습니다
원무현 시인 / 옥수수껍질을 벗기며
잘 익은 옥수수껍질을 벗기면서 한 겹 한 겹 노란 수의를 입혔던 시신을 생각한다
옥수수는 껍질을 벗길수록 알맹이의 단단함이 손끝으로 전해오지만 망자는 수의를 한 벌 두 벌 입히면 입힐수록 그의 실체를 드러낸다
염의 마지막 의식에 들어 얼굴이 가려지면 내 손끝엔 바늘처럼 꽂혀있던 시신의 싸늘한 체온이 빠져나가고 고스란히 묶은 눈물겨운 한 생의 수확물, 껍질을 벗기지 않은 옥수수처럼 누운 시신에 유족이 오열을 뿌리며 마저 풀지 못하고 한으로 묶어간 매듭을 만진다 망자의 삶이 껍질을 다 벗긴 옥수수처럼 울퉁불퉁 만져진다
원무현 시인 / 전시장에 가다
겨울이 발톱만 살짝 데치고 가는 남도 해운대에 수십 년 만에 눈이 오고 있다
가로등이 길 위에 그려 넣자 곧 사라지는 흰 발자국을 읽고 있다 백사장에 흩어진 발자국을 읽기보다 더 난해하다
동백나무에 내려앉자 곧 날아가 버리는 흰나비의 자세를 비춰보는 등대 묶여 있는 폐선의 발목을 읽어낼 때보다 더 강렬한 촉광을 쏟아내고 있다
괭이갈매기가 흰 똥으로 서둘러 낙관을 찍는다 바닷바람이 재빠르게 달려와 그림을 가져간다
해운대가 몇 장의 그림을 물 속에 전시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일출과 일몰을 펼쳐놓는 바다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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