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산 시인 / 저녁의 높이
저무는 것 앞에 서면 다 내려놓고 엎드리고 싶어진다 아귀힘 풀고 무조건 다 져 주고 싶어진다
아비의 애첩이 곧 임종할 것 같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랬다
늘 고개 숙이고 걸었던 사춘기 다 그년 때문이었는데 노파의 병상 아래서 무릎이 문드러져 질질 흘러내리고 있었다
호주머니에 손 넣고 일몰을 바라보고 섰노라면 세상 모든 오빠들이 한꺼번에 달려와 휘파람을 불어 주는 거 같아
나를 에워싸고 그렇제! 그렇제! 그렇제! 그러는 거 같아
무조건 응! 응! 응! 그래야 할 거 같아
오늘도 수굿이 해가 진다 그러라고 하루 한 번 해도 져 준다
윤이산 시인 / 감자를 먹습니다
또록또록 야무지게도 영근 것을 삶아놓으니 해토解土처럼 팍신해, 촉감으로 먹습니다 서로 관련 있는 것끼리 선으로 연결하듯 내 몸과 맞대어 보고 비교 분석하며 먹습니다 감자는 배꼽이 여럿이구나, 관찰하며 먹습니다 그 배꼽이 눈이기도 하구나, 신기해하며 먹습니다 호미에 쪼일 때마다 눈이 더 많아야겠다고 땅 속에서 캄캄하게 울었을, 길을 찾느라 여럿으로 발달한 눈들을 짚어가며 먹습니다 용불용설도 감자가 낳은 학설일 거라, 억측하며 먹습니다 나 혼자의 생각이니 다 동의할 필요는 없겠지만 옹심이 속에 깡다구가 들었다는 건 반죽해 본 손들은 다 알겠지요 오직 당신을 따르겠다₁₎는 그 일념만으로 안데스 산맥에서 이 식탁까지 달려왔을 감자의 줄기를 당기고 당기고 끝까지 당겨보면 열세 남매의 골병든 바우 엄마, 내 탯줄을 만날 것도 같아 보라 감자꽃이 슬퍼 보인 건 그 때문이었구나, 쓸쓸에 간 맞추느라 타박타박 떨어지는 눈물을 먹습니다
₁₎ 오직 당신을 따르겠다 : 감자꽃의 꽃말
- 계간 <다층> (2010년 가을호)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석원 시인 / 반향(Echoes) 외 1편 (0) | 2022.11.26 |
---|---|
배우식 시인 / 계단은 계단을 (0) | 2022.11.26 |
원무현 시인 / 저녁 무렵 외 2편 (0) | 2022.11.26 |
진란 시인 / 새의 의미 (0) | 2022.11.26 |
양진기 시인 / 처음처럼 외 1편 (0) | 2022.1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