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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윤이산 시인 / 저녁의 높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26.

윤이산 시인 / 저녁의 높이

 

 

저무는 것 앞에 서면

다 내려놓고 엎드리고 싶어진다

아귀힘 풀고 무조건 다 져 주고 싶어진다

 

아비의 애첩이 곧 임종할 것 같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랬다

 

늘 고개 숙이고 걸었던 사춘기

다 그년 때문이었는데

노파의 병상 아래서

무릎이 문드러져 질질 흘러내리고 있었다

 

호주머니에 손 넣고

일몰을 바라보고 섰노라면

세상 모든 오빠들이 한꺼번에 달려와

휘파람을 불어 주는 거 같아

 

나를 에워싸고

그렇제! 그렇제! 그렇제!

그러는 거 같아

 

무조건

응! 응! 응!

그래야 할 거 같아

 

오늘도 수굿이 해가 진다

그러라고 하루 한 번 해도 져 준다

 

 


 

 

윤이산 시인 / 감자를 먹습니다

 

 

또록또록 야무지게도 영근 것을 삶아놓으니

해토解土처럼 팍신해, 촉감으로 먹습니다

서로 관련 있는 것끼리 선으로 연결하듯

내 몸과 맞대어 보고 비교 분석하며 먹습니다

감자는 배꼽이 여럿이구나, 관찰하며 먹습니다

그 배꼽이 눈이기도 하구나, 신기해하며 먹습니다

호미에 쪼일 때마다 눈이 더 많아야겠다고

땅 속에서 캄캄하게 울었을,

길을 찾느라 여럿으로 발달한 눈들을 짚어가며 먹습니다

용불용설도 감자가 낳은 학설일 거라, 억측하며 먹습니다

나 혼자의 생각이니 다 동의할 필요는 없겠지만

옹심이 속에 깡다구가 들었다는 건

반죽해 본 손들은 다 알겠지요

오직 당신을 따르겠다₁₎는 그 일념만으로

안데스 산맥에서 이 식탁까지 달려왔을 감자의

줄기를 당기고 당기고 끝까지 당겨보면

열세 남매의 골병든 바우 엄마, 내 탯줄을 만날 것도 같아

보라 감자꽃이 슬퍼 보인 건 그 때문이었구나,

쓸쓸에 간 맞추느라 타박타박 떨어지는

눈물을 먹습니다

 

₁₎ 오직 당신을 따르겠다 : 감자꽃의 꽃말

 

- 계간 <다층> (2010년 가을호)

 

 


 

윤이산 시인

1961년 경북 경주에서 출생. 경주 문예대학 수료. 경주대 사회교육원 문창반 수료.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 2009년 《영주일보》신춘문예에 〈선물〉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물소리를 쬐다』. 계간 《문학청춘》 기획위원. '시in', '응시',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