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진기 시인 / 처음처럼
처음처럼 주세요 처음처럼 돌아가신 신영복 선생님께 한 잔 올리고 싶어 푸른 소주병에 쓰인 글자를 기울이면 처처음럼, 처처음럼 여기저기서 럼주를 따르는 왁자한 선술집으로 들어서지
저마다 몸 한 구석에 푸른 기둥을 세우고 가투에서 돌아온 스무 살 우리가 소주를 마시고 있어 물불 가리지 않고 제 몸을 불살라 이루려했던 혁명 스크럼 짜고 전진하던 대오 메뚜기 떼처럼 흩어졌다 다시 모여들던 선술집 탁자 위에 빈 술병은 늘어가고 비틀거리는 새벽으로 혁명은 사라졌고 우리는 희미해졌어
누구는 타도를 외치던 정당으로 들어가 정치인이 되고 누구는 매판자본이라고 욕하던 기업체 이사가 되고 이도저도 아닌 우리는 싸구려 술집에 모여 설계할 수 없는 미래를 술잔 속에 빠뜨리고 있어 한 잔을 마시니 스무 살 청년이야 술병을 다 비우면 꿈꾸었던 혁명이 되살아날까 이모, 처음처럼 한 병 더
병목에 달라붙은 그녀가 웃고 있어 푸른 입술을 둥글게 말아 속삭이고 있어 움직이는 건 시간이지 사랑이 아냐 죽어도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는 거야 그러니 언제나 처음처럼 천 잔을 마셔도 첫 잔처럼
-시집 신전의 몰락』에서
양진기 시인 / 서리
공중을 떠도는 한숨의 기록이다 죽은 이들의 발설하지 못한 유언을 적은 설형문자다 한이 깊어 하루아침에 백발이 된 여인의 머릿결이다
냉정한 세상에 서리가 가득하다 원망이 하얗게 달라붙어 풀의 목을 꺾는다 서릿발에 베여 흰 피가 낭자하다
창백한 유리창에 귀를 대고 서러운 이의 이야기를 듣는다 얼어붙은 표면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쓰다듬다 입김을 불면 글썽이며 녹아내리는 눈물
날이 밝으면 사라지는 영혼 응달 한구석에는 서러운 사연 한 무더기 햇빛에 하얗게 부서지고 있다
-계간 『시에』 2017년 가을호, <시와에세이>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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