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규 시인 / 물결종이
물고기가 수면에 잠들어 있다 강이 물결종이로 어탁(魚拓)을 하고 있는 중 아득한 허공 너머에 사는 어떤 신(神)이 내려와 내 몸에 먹을 칠하고 탁본을 뜨는 상상, 그러나 신(神)을 만난 적이 없으니 공허할 뿐,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아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탁본을 떠 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을 텐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므로 몽롱할 뿐, 강물로 씻어내는 내 몸의 비린내가 사방으로 번질 때 그 비린내 맡고 가장 먼저 달려오는 사람에게 탁본을 맡겨도 될 것 그럴 것 없이 차라리 강에게 맡기는 건 어떨까 강이 햇빛 먹을 칠한 내 몸에 부드러운 물결종이를 대고 탁본 뜨는 상상, 물결종이에 탁본이 된 내 몸이 강 위에 둥둥 떠다닐 때 그때는 내가 일생동안 강을 탁본 뜨기 위하여 내 속의 어둠 덩어리를 꺼내 먹으로 갈지 않을지
-『김포신문/김부회의 시가 있는 아침』2022.06
김충규 시인 / 잠이 참 많은 당신이지
오늘 내가 공중의 화원에서 수확한 빛 그 빛을 몰래 당신의 침대 머리맡에 놓아주었지 남은 빛으로 빚은 새를 공중에 날려보내며 무료를 달랬지 당신은 내내 잠에 빠져 있었지 매우 상냥한 것이 당신의 장점이지만 잠자는 모습은 좀 마녀 같아도 좋지 않을까 싶지 흐린 날이라면 비둘기를 불러 놀았겠지 비둘기는 자기들이 사람족이 다 된 줄 알지 친절하지만 너무 흔해서 새 같지가 않지 비둘기가 아니라면 어느 새가 스스럼없이 내 곁에 올까 하루는 길지 당신은 늘 시간이 모자란다고 말하지만 그는 잠자는 시간이 길어서 그래 가령 아침의 창가에서 요정이 빛으로 뜨개질을 하는 소리 당신은 한 번도 듣지 못하지 그게 불행까진 아니지만 불운인 셈이지 노파들이 작은 수레로 주워2w모은 파지들이 오래지 않아 새 종이로 탄생하고 그 종이에 새로운 문장들이 인쇄되는 일은 참 즐겁지 파지 줍는 노파들에게 훈장을 하나씩!! 당신도 그리 잠을 오래 잔다면 노파가 될 때 파지를 줍게 될 거야 라고 악담했지만 그런 당신의 모습도 나쁘진 않지 잠이 참 많은 당신이지 마부가 적탄 같은 어둠을 마차에 싣고 뚜벅뚜벅 서쪽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보지 못하지만 꼭 봐야 할 건 아니지 잠자면서 잠꼬대를 종달새처럼 지저궐 때 바람 매운 날 이파리와 이파리가 서로 입술을 부비듯 한껏 내 입술도 부풀지 더 깊은 잠을 자도 돼요 당신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수우 시인 / 聖발바닥 외 1편 (0) | 2022.11.30 |
---|---|
송수권 시인 / 까치밥 외 1편 (0) | 2022.11.30 |
이제하 시인 / 빈 들판 외 1편 (0) | 2022.11.29 |
이동순 시인 / 탄식 외 1편 (0) | 2022.11.29 |
김초혜 시인 / 사랑굿 10 외 2편 (0) | 2022.1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