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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충규 시인 / 물결종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29.

김충규 시인 / 물결종이

 

 

물고기가 수면에 잠들어 있다

강이 물결종이로 어탁(魚拓)을 하고 있는 중

아득한 허공 너머에 사는 어떤 신(神)이 내려와

내 몸에 먹을 칠하고 탁본을 뜨는 상상,

그러나 신(神)을 만난 적이 없으니 공허할 뿐,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아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탁본을 떠 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을 텐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므로 몽롱할 뿐,

강물로 씻어내는 내 몸의 비린내가 사방으로 번질 때

그 비린내 맡고 가장 먼저 달려오는 사람에게 탁본을 맡겨도 될 것

그럴 것 없이 차라리 강에게 맡기는 건 어떨까

강이 햇빛 먹을 칠한 내 몸에 부드러운 물결종이를 대고

탁본 뜨는 상상,

물결종이에 탁본이 된 내 몸이 강 위에 둥둥 떠다닐 때

그때는 내가 일생동안 강을 탁본 뜨기 위하여

내 속의 어둠 덩어리를 꺼내 먹으로 갈지 않을지

 

-『김포신문/김부회의 시가 있는 아침』2022.06

 

 


 

 

김충규 시인 / 잠이 참 많은 당신이지

 

 

오늘 내가 공중의 화원에서 수확한 빛

그 빛을 몰래 당신의 침대 머리맡에 놓아주었지

남은 빛으로 빚은 새를 공중에 날려보내며 무료를 달랬지

당신은 내내 잠에 빠져 있었지

매우 상냥한 것이 당신의 장점이지만

잠자는 모습은 좀 마녀 같아도 좋지 않을까 싶지

흐린 날이라면 비둘기를 불러 놀았겠지

비둘기는 자기들이 사람족이 다 된 줄 알지

친절하지만 너무 흔해서 새 같지가 않지

비둘기가 아니라면 어느 새가 스스럼없이 내 곁에 올까

하루는 길지 당신은 늘 시간이 모자란다고 말하지만

그는 잠자는 시간이 길어서 그래

가령 아침의 창가에서 요정이 빛으로 뜨개질을 하는 소리

당신은 한 번도 듣지 못하지 그게 불행까진 아니지만 불운인 셈이지

노파들이 작은 수레로 주워2w모은 파지들이

오래지 않아 새 종이로 탄생하고 그 종이에

새로운 문장들이 인쇄되는 일은 참 즐겁지

파지 줍는 노파들에게 훈장을 하나씩!!

당신도 그리 잠을 오래 잔다면

노파가 될 때 파지를 줍게 될 거야

라고 악담했지만 그런 당신의 모습도 나쁘진 않지

잠이 참 많은 당신이지 마부가 적탄 같은 어둠을 마차에 싣고

뚜벅뚜벅 서쪽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보지 못하지만

꼭 봐야 할 건 아니지

잠자면서 잠꼬대를 종달새처럼 지저궐 때

바람 매운 날 이파리와 이파리가 서로 입술을 부비듯

한껏 내 입술도 부풀지

더 깊은 잠을 자도 돼요 당신

 

 


 

김충규 시인 (1965.11.1~2012.3.18)

1965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 서울예대 문창과 졸업. 1998년 《문학동네》 하계 문예공모로 등단. 시집으로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천년의시작, 2002), 『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문학동네, 2003), 『물 위에 찍힌 발자국』(실천문학사, 2006), 『아무 망설임 없이』(문학의 전당, 2010), 유고시집 『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문학동네, 2013) 등이 있음. 계간 『시인시각』 발행인 역임. 제1회 미네르바작품상 등 수상. 2012년 3월 심장마비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