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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명원 시인 / 죄를 고해하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30.

김명원 시인 / 죄를 고해하다

 

 

사랑했던 사람아,

네가 원하는 때를 골라

마음의 제방을 허물어

너의 강이 넘치도록 두고

너의 물이랑들이 타오르도록 다만 둔 것,

나의 첫 죄를 고해한다.

 

배고픈 강녘에 가만 앉아

스스로 황홀해질 때까지

내 살점 하나씩 떼어내어

네 입에 물수제비로 떠 넣어주며

점점이 어둠과 안개의 다리에 의지하고

평생 너만을 지켜본 죄, 너만을 기다린 죄,

나의 큰 죄를 고해한다.

 

느끼는 무릎 간신히 세워

백발의 바람에 나부끼면서

사랑했던 사람아,

원하는 것 무엇 더 주련.

너만을 그리다 멀어버린 두 귀

너만을 노래하다 목 쉰 심장

너만을 용서하다 누더기 된 언어

사랑했던 사람아,

여리고 여려 간절한 일생이 너와 나 사이에 있었다고

여기에 그렇게 써도 되겠니?

 

- 시집『사랑을 견디다』(푸른사상, 2010)

 

 


 

 

김명원 시인 / 녹차 밭에 가자

 

 

찻잎 따는 사람 보이지 않고

삼 밭 은은한 향기가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녹차밭

댓잎 살랑이 노랑딱새 휘파람새 뛰노는

샛강을 지나 촘촘한 햇살 비집고 우리는가자

세상 존재들이 포물선 그리듯이

긴 여운이 살아 있을 때

현을 긋던 활 내려놓고 쉼표를 찍어보자

하늘과 바다가 잇닿는 차밭에서

찻잎 부닥치는 소리 들으며

녹차꽃 빛깔로 하얗게 웃어보자

 

나의 푸른빛 다 소멸되기 전

향 담은 금빛 햇살 한 자락 깔고

녹색 침대에 누워보자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듯

나의 시간은 오후 다섯시를 넘어서고 있다

 

​노루꼬리 노을이 바다 속으로 잠기기 전

오선지 한가득 우리의 사랑 그려보자

 

 


 

김명원 시인

1959년 충남 천안에서 출생. 이화여대 약학과 및 성균관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문학박사. 1996년 《詩文學》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 『슬픔이 익어, 투명한 핏줄이 보일 때까지』 『달빛 손가락』 『사랑을 견디다』와 시인 대담집 『시인을 훔치다』 등이 있음. 『애지』 『시선』 『시와인식』 『시와상상』 웹진 『시인광장』등에서 편집위원으로 활동. 대전대학교 H-LAC 혜화리버럴아츠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