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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지호 시인 / 포에지(Poésie)*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1. 30.

이지호 시인 / 포에지(Poésie)*

 

 

전문가의 세련된 작품이 때때로 답답할 때가 있고

학생의 서툰 작품이 낭만을 불러오기도 한다

 

가구박람회에서 볕뉘처럼 불현듯 튀어나온 시

의자가 시가 될 수 있다니

 

투박한 철제 의자가

묵묵히 제 길을 가겠다는 의지처럼 오롯이 빛나고

속이야말로 절대로 속이면 안 되는 것

한 땀 한땀 손바느질한 쿠션에는 습작생의 시절이 촘촘히 박음질되어 있다

 

놓이는 시간 위치 상황에 따라 스토리를 입힌다는

무엇이든 받아주는 의자에서

의자는 미래의 디자이너에게 스토리를 만들어주고

가벼운 적 없었을 앳된 손은 공손하게 작품을 토닥이고

 

수줍은 듯 작품을 소개하는 학생 입가의 가는 떨림에서

레드닷 위너의 수상 소감을 미리 본 것 같기도

 

Poésie가 정갈하게 서늘한 각오로 예의를 지키고

다양한 내면의 모습처럼

나만의 색깔을 표출하는

내 세계가 하나의 낭만스토리로 푹신하게 앉는다

 

* 2021년 가구리빙디자인어워드>에 출품된 학생 작품명, 프랑스어로 '시' 이다.

 

 


 

 

이지호 시인 / 앵두

 

 

대접에 청태 낀

빗물 정화수가 말라 가는, 한 집안의 내력이 곰삭아 가는 장독대

앵두가 와글와글 커지고 있다

 

집 뒤란으로 불안을 데리고 오빠가 돌아왔다

뒤꼍으로 들어온 흉터

흰 천에 붉은 날들이 가끔 구겨지곤 했다

누군가를 물들이고 싶어 하던 그리움의 병

맑은 날 화투장에 우산을 쓰고 손님이 찾아오는 날이면

기침 대신 앵두가 툭툭 떨어지곤 했다

 

혼자 놀다 가는 청춘

젊음이 몸을 버리는 시간 함께 맞이한 곳도 뒤란이고 내 사춘기 우울이 가장 많이 나온 곳도 뒤란이었다

 

바람이 물어뜯고 간 날들

사람이 살지 않는 옛집은 앞마당도 뒤뜰도 없다

핏방울 같은 앵두가 배어 나오는 담장 옆

바람에 물린 자국만 선명한 뒤꼍

 

어둠이 울컥 게워 놓은 앵두만 뒤란을 밝히고 있다

 

-시집 『색색의 알약들을 모아 저울에 올려놓고』 2021.

 

 


 

이지호 시인

1970년 충남 부여에서 출생. 충남대학교 식품영양학과 졸업.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석사 졸업. 2011년 제11회 《창비신인시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말끝에 매달린 심장』(문학수첩, 2017)과 『색색의 알약들을 모아 저울에 올려놓고』(걷는사람, 20121)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