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호 시인 / 포에지(Poésie)*
전문가의 세련된 작품이 때때로 답답할 때가 있고 학생의 서툰 작품이 낭만을 불러오기도 한다
가구박람회에서 볕뉘처럼 불현듯 튀어나온 시 의자가 시가 될 수 있다니
투박한 철제 의자가 묵묵히 제 길을 가겠다는 의지처럼 오롯이 빛나고 속이야말로 절대로 속이면 안 되는 것 한 땀 한땀 손바느질한 쿠션에는 습작생의 시절이 촘촘히 박음질되어 있다
놓이는 시간 위치 상황에 따라 스토리를 입힌다는 무엇이든 받아주는 의자에서 의자는 미래의 디자이너에게 스토리를 만들어주고 가벼운 적 없었을 앳된 손은 공손하게 작품을 토닥이고
수줍은 듯 작품을 소개하는 학생 입가의 가는 떨림에서 레드닷 위너의 수상 소감을 미리 본 것 같기도
Poésie가 정갈하게 서늘한 각오로 예의를 지키고 다양한 내면의 모습처럼 나만의 색깔을 표출하는 내 세계가 하나의 낭만스토리로 푹신하게 앉는다
* 2021년 가구리빙디자인어워드>에 출품된 학생 작품명, 프랑스어로 '시' 이다.
이지호 시인 / 앵두
대접에 청태 낀 빗물 정화수가 말라 가는, 한 집안의 내력이 곰삭아 가는 장독대 앵두가 와글와글 커지고 있다
집 뒤란으로 불안을 데리고 오빠가 돌아왔다 뒤꼍으로 들어온 흉터 흰 천에 붉은 날들이 가끔 구겨지곤 했다 누군가를 물들이고 싶어 하던 그리움의 병 맑은 날 화투장에 우산을 쓰고 손님이 찾아오는 날이면 기침 대신 앵두가 툭툭 떨어지곤 했다
혼자 놀다 가는 청춘 젊음이 몸을 버리는 시간 함께 맞이한 곳도 뒤란이고 내 사춘기 우울이 가장 많이 나온 곳도 뒤란이었다
바람이 물어뜯고 간 날들 사람이 살지 않는 옛집은 앞마당도 뒤뜰도 없다 핏방울 같은 앵두가 배어 나오는 담장 옆 바람에 물린 자국만 선명한 뒤꼍
어둠이 울컥 게워 놓은 앵두만 뒤란을 밝히고 있다
-시집 『색색의 알약들을 모아 저울에 올려놓고』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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