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원 시인 / 죄를 고해하다
사랑했던 사람아, 네가 원하는 때를 골라 마음의 제방을 허물어 너의 강이 넘치도록 두고 너의 물이랑들이 타오르도록 다만 둔 것, 나의 첫 죄를 고해한다.
배고픈 강녘에 가만 앉아 스스로 황홀해질 때까지 내 살점 하나씩 떼어내어 네 입에 물수제비로 떠 넣어주며 점점이 어둠과 안개의 다리에 의지하고 평생 너만을 지켜본 죄, 너만을 기다린 죄, 나의 큰 죄를 고해한다.
느끼는 무릎 간신히 세워 백발의 바람에 나부끼면서 사랑했던 사람아, 원하는 것 무엇 더 주련. 너만을 그리다 멀어버린 두 귀 너만을 노래하다 목 쉰 심장 너만을 용서하다 누더기 된 언어 사랑했던 사람아, 여리고 여려 간절한 일생이 너와 나 사이에 있었다고 여기에 그렇게 써도 되겠니?
- 시집『사랑을 견디다』(푸른사상, 2010)
김명원 시인 / 녹차 밭에 가자
찻잎 따는 사람 보이지 않고 삼 밭 은은한 향기가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녹차밭 댓잎 살랑이 노랑딱새 휘파람새 뛰노는 샛강을 지나 촘촘한 햇살 비집고 우리는가자 세상 존재들이 포물선 그리듯이 긴 여운이 살아 있을 때 현을 긋던 활 내려놓고 쉼표를 찍어보자 하늘과 바다가 잇닿는 차밭에서 찻잎 부닥치는 소리 들으며 녹차꽃 빛깔로 하얗게 웃어보자
나의 푸른빛 다 소멸되기 전 향 담은 금빛 햇살 한 자락 깔고 녹색 침대에 누워보자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듯 나의 시간은 오후 다섯시를 넘어서고 있다
노루꼬리 노을이 바다 속으로 잠기기 전 오선지 한가득 우리의 사랑 그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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