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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천융희 시인 / 전갈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5.

천융희 시인 / 전갈

 

 

마악 떠날 채비를 마친 터미널은 야행성이다

 

태양에 맞물린 밤의 세계

 

떠도는 어둠의 중심에서

허둥지둥 가벼워지는 어린 연인들은

여전히 고생대의 변온동물처럼

환해졌다 캄캄해지기를 반복한다

 

꼬리를 감추고 사라진 맹독이

벽에 기댄 벤치 위

불립문자처럼 남아있는 곳

 

출몰이 잦은 터미널은

뜨거워졌다 순간 식어버리며 늘 고전적인 자세다

다시 이별을 시작할지도 몰라

오늘은 이별 중

 

차갑게 식어버린 비문이

뚝뚝 끊긴 문장이

차창 안으로 흘러내리고

 

곳곳

먼 발자국 소리만 벗어둔 채

기별 없는 당신은

 

어쩌면 이미 나와 이별했는지도 모른다

 

 


 

 

천융희 시인 / 여기서 말한 건 여기서

 

 

여기서, 끝인 거 알지?

 

그들은 틈만 나면 은밀한 족속을 형성한다

 

혀의 돌기를 현란하게 휘감아 이 바닥의 생존법을 터득하며 즐기는 편 흩어졌다 뜬금없이 뭉치는 그들은 각자의 발언대를 신뢰하는 분위기다 일정한 거리를 소신 있게 재고 그어가며 은근히 뒷면을 공략한다

 

그들은 자주 도로 위를 질주한다

 

한동안 배설하지 못한 입담을 열렬히 쏟아낸다

틈틈이 제조한 비밀은 밀착력이 강해선지 조금만 머리를 맞대면 재편집도 가능하다

 

방향을 바꾸면 새로운 얼굴이 된다

 

불쑥 튀어나온 사생활에 더욱 몰입하다 보면 더더욱 친밀도가 상승한다

 

우리는 소리 없이 뭉치고 기약도 없이 흩어지며 결말도 없이

 

아주 오랜만에 만난 사람처럼

금방 또 볼 것처럼

 

여기서 말한 건 여기서 끝인 거, 알지?

 

 


 

천융희 시인

1965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 2011년 《시사사》로 등단. 시집으로 『스윙바이』가 있음. 경남일보 <천융희의 디카시로 여는 아침> 연재 중. 2019년 제2회 유등작품상, 2020년 이병주경남문인상 수상. 경남문인협회, 창원문인협회, 경남시인협회, 한국시인협회 회원. 계간 《시와경계》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