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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금성 시인 / 술래의 어머니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5.

박금성 시인 / 술래의 어머니

 

 

가파르고 경사진 우린 볼 수 없었어

완전히 숨을 수 없는 곳에서

온전히 찾을 수 있는 곳으로

내가 없는 거긴 남겨진 한 장 사진

등이 켜지고

 

찾지 마라, 곧 돌아올 것이니

당신은 햇빛도 없이 나를 뜨겁게 찾아온다

 

비탈진 언덕 좁다란 길을 돌아가면

어디쯤에서 술래잡기하는 어머니

쪼그리고 앉은 나를 찾아다닐까

 

한 생애만으로 닿을 수 없는 거리에

동생들은 제기차기 한창인데

밑창 떨어진 울음으로는

아무리 눈 비벼도 끼어들 수 없다

 

나는 나를 잡고 있지만 나는 나를 느낄 수 없는

열하나 열둘 열셋...

어머니를 반복해서 세다가 날이 새어버린

그리움의 나이를 누가 갈라놓았나

 

밤마다 찰나의 숲에서

우리는 한시름만 계속되는 매일 밤

희미하게 길을 잃어갈수록 선명하게

또 만난다.

 

 


 

 

박금성 시인 / 창공을 세시는 노스님

 

 

제삿날 노스님이 단감 숫자를 세시는데

하나라도 없어지는 날엔 야단이다

 

법당 처마만큼 기울어져가는 늦가을

까치 떼 단감나무에 앉아 법석인다

 

달려가 몰아내도 힐끗거릴 뿐

 

까치 떼 날아간 뒤

노스님이 창공을 세시다가

말을 건네신다

동자야 너니?

말 못 하고 서 있으니 내가 범인이다

 

노스님 제삿날

큰 단 감 두 번째와 세 번째 행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나를 잡고 가슴을 쫀다

 

 


 

 

박금성 시인 / 유년의 뺨

 

 

창공을 철새들이 하늘을 끊으며 날아가고

 

갈라진 허공에서 태어나는 구름 사이로

아무도 잊지 않는 아침이 오네

 

햇살의 따가운 시선을 햇살이 볼 수 없듯

가슴이 등을 만질 수 없는

손바닥은 손등을 펴서 무심히 바라보네

 

구름이 구름을 모아 생긴 틈으로 햇빛이 떠다니는 것이네

 

뭉게구름 몇 개가 이어질 듯 멀어질 듯

서쪽으로 사라지고

 

바람이 낙엽을 입고 언뜻 드러난

푸르르 질린 얼굴은 누가 그려 놓았나

 

뒤집어 보면 동그랗게 젖어있는

유년의 뺨도

떠도는 구름처럼 마를 날이 없었네

 

2021년 계간《서정시학》여름호 신인상 등단시

 

 


 

 

박금성 시인 / 가젤

 

 

습지에서 악어에게 다리를 물린 가젤

살점을 떼 주며 목숨을 건진다

 

절뚝절뚝 힘겹게 오른 습지 둑 언저리

흙을 바짝 태우는 땡볕을 등에 이고

우두커니 가젤이 서 있다

 

살점 떨어져 나간 발목에 소똥같이 뭉쳐있는

파리 떼

느리고 무겁게 머리 흔들며 파리 떼를 쫓아간다

 

줄에 매달린 팽이처럼 덜렁거리는 발목

걸음을 떼지 못하고 방아 찧듯 세우는 다리

땅에 코를 묻고 움직이지 못한다

 

늘어져 있던 사자 고개 들어 가젤을 바라보고

 

머리를 천천히 들어 올리는 가젤

덜렁거리는 발목으로 한발 한발 사자에게 다가간다

핏물을 땅에 그으며

 

앞다리를 세워 허리를 세우는 사자

날벌레 엉겨 붙는 귀를 털며

콧구멍을 넓힌다

 

가젤의 눈에 다닥다닥 붙어 앉는 파리 떼

머리 한번 흔들지 않고 사자와 거리를 좁힌다

 

사자와 한 뼘의 거리에서 눈을 맞추는 가젤

사자의 턱 밑에 머리를 집어넣고 몸을 바닥에 던진다

 

한동안 가젤을 내려다보던 사자

 

길고 두꺼운 죽음을 가젤의 목에 꽂는다

아랫니와 윗니가 맞닿은 곳에서

지나온 생애의 흐느낌이 새어 나온다

 

시집『웃는 얼굴』(서정시학, 2022) 수록

 

 


 

 

박금성 시인 / 말대신, 간월도

 

 

엄마가 팔다리 빠진 아들을 데리고 마중을 나간다

때론 빈 배로도 오는 작은 어선을 향해

 

아들의 빠진 팔이 엄마를 휘적휘적 앞서간다

아들의 빠진 다리가 껑충껑충 앞서간다

엄마가 혀로 잇몸 때리는 소리를 낸다

힘없이 땅을 차며 아들의 팔을 잡는다

 

아들이 엄마를 향해 입을 벌린다

말 대신 눈알이 튀어나온다

늙은 엄마가 아들의 눈꺼풀을 내려준다

 

아들이 힘없이 휘적이는 팔을 허리에 묶는다

아들이 넘어질 듯 빨라지는 다리를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아들이 엄마와 나란히 걸어간다

엄마가 구름 낀 하늘 보듯

아들을 바라본다

 

늙은 엄마가 무릎을 버리고 아들의 옷소매를 잡아당긴다

축 늘어진 아들의 오른팔이 엄마의 허리를 감는다

엄마가 허리 감는 아들의 팔을 보며 코를 푼다

 

엄마를 등에 올리려는 아들

아들의 등에 올라타려는 엄마

아들의 옷을 잡고 미끄러지는 엄마

엄마와 넘어지는 아들

 

늙은 엄마의 누런 틀니가 입 밖으로 나오고

아들의 콧등에 밭골보다 깊은 골이 생긴다

늦은 오후, 두 사람이 붉은 해를 타고 어선에 이른다

 

시집『웃는 얼굴』(서정시학, 2022) 수록

 

 


 

박금성 시인

1963년 충남 아산 출생.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도신승려, 서광사 주지. 2020년 계간 《서정시학 》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웃는 얼굴』(서정시학, 2022)이 있음. 충남 시인협회상 수상. 수덕사 성보박물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