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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선희 시인 / 엄마의 칼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9.

이선희 시인 / 엄마의 칼

 

 

엄마는 나를 이쪽저쪽

돌려가며 갈고닦아주었다

칼날 같은 교복을 입고

아침저녁으로 버스 통학을 했다

날을 세우며 칼날 눈빛을 반짝였다

나는 잘 갈린 엄마의 칼이었다

 

갈린 지 오래되어 뭉툭해진 지금

나는 이곳저곳 쑤시고 다니지만

신통치 않은 칼 놀림으로

일 처리가 매끄럽지 못하다

얄팍하게 저미는 지혜와

단호하게 썰어 낼 용기가 필요하지만

썰어 낼 것과

썰지 말아야 할 것도 구분하지 못하고

구석구석 굴러다닌다

 

뭉툭해진 칼을 가지고

엄마는 지금 밭에서 시금치를 캐고 있다

호미의 용도가 된 칼

품위 있는 주방이 거처가 아니다

흙이 묻은 칼을 엄마는 밭고랑에 던져둔다

웹진 『시인광장』 2022년 10월호 발표

 

 


 

이선희 시인

​충남 공주에서 출생. 2007년 《시와 경계》로 등단. 시집으로 『우린 서로 난간이다』 『소금의 밑바닥』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