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희 시인 / 엄마의 칼
엄마는 나를 이쪽저쪽 돌려가며 갈고닦아주었다 칼날 같은 교복을 입고 아침저녁으로 버스 통학을 했다 날을 세우며 칼날 눈빛을 반짝였다 나는 잘 갈린 엄마의 칼이었다
갈린 지 오래되어 뭉툭해진 지금 나는 이곳저곳 쑤시고 다니지만 신통치 않은 칼 놀림으로 일 처리가 매끄럽지 못하다 얄팍하게 저미는 지혜와 단호하게 썰어 낼 용기가 필요하지만 썰어 낼 것과 썰지 말아야 할 것도 구분하지 못하고 구석구석 굴러다닌다
뭉툭해진 칼을 가지고 엄마는 지금 밭에서 시금치를 캐고 있다 호미의 용도가 된 칼 품위 있는 주방이 거처가 아니다 흙이 묻은 칼을 엄마는 밭고랑에 던져둔다 웹진 『시인광장』 2022년 10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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