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정이랑 시인 / 와송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9.

정이랑 시인 / 와송

 

 

바위 위에서 소나무처럼 자란다고

당신을 바위솔이라고도 부르더군요

 

항암작용에 좋다는 와송,

갑상선암으로 주름살만 늘어난

어머니에게 드리고 싶어

망설임 없이 뿌리채 뽑았지요

 

무엇이든 몸 속의 것이라면

다 꺼내어주고 싶은데

당신만한 효능이 저에게는 없더군요

 

병상에서 링거 맞고 있는 어머니,

어머니에게 나는 무엇이었을까요

고장난 수도꼭지마냥 눈물이 흐릅니다

 

세 살이 되던 겨울밤이었을 겁니다

경끼한 나를, 어머니는 버선발로 업고

이웃마을 칠성할멈에게 갔었지요

 

그래요, 어머니에게 오늘만큼은

와송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정이랑 시인 / 겨울 은해사

 

 

육신이 머물렀던 마을에서

영혼의 터를 찾아 당도한 겨울 산사

사람 그림자라곤 볼 수 없는,낙엽만이 목탁소리에 끌려

바람에 쓸리고 있을 뿐 오래 비워둔 외길은

처진 발목을 잡아당겼다 하늘을 찌를 듯한 가지마다

미끄러지는 이름 모를 산새의 잿빛 울음

길을 잃어버리고 싶었다 속절없이 무너져 내려

한 줌 따스한 흙으로 뒤덮여 뼈마저 삭아지면

강물처럼 출렁이는 푸른 목소리로 살아나

말라버린 행인의 빈 가슴에 젖어들까 보다

발목이 시렵다 불빛 하나 없는 고요 속에

홀로 장작을 나르는 동승의 얼굴 가득 피어나는 미소

막 어둠 속을 뛰쳐나온 별빛 같았다

아궁이에 활활 타는 불속 저녁이 익고

낯설음이 타버리고 부끄럽게 살아온 날들이 화끈거렸다

얼어붙은 흉장까지 녹아내려 돌아설 때

동승은 인사대신 염주를 손목에 끼워 주었고

맺힌 눈물이 풀리면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정이랑 시인

1969년 경북 의성 출생. 본명 정은희. 1997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떡갈나무 잎들이 길을 흔들고』와 『버스정류소 앉아 기다리고 있는』 『떡갈나무 잎들이 길을 흔들고』 『청어』가 있음. 현재 '사림시', '시원'  동인으로 활동. 한국시인협회 회원. 1997년  「한국여성문학상」 수상.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의 해「불교문학상」 시 당선. 한국시인협회, 대구문인협회, 대구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