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웅 시인 / 세월의 갈피
오래된 장롱을 열었을 때처럼 살다보면 세월에서 문득 나프탈렌 냄새가 날 때가 있다 어딘가에 마무리하지 못하고 온 사랑이 두고 온 마음이 쿡, 코를 찌를 때가 있다
썩어 없어지지 못한 삶이 또 다른 시간으로 자라는 저 세월의 갈피
들판에는 내가 켜놓은 등불이 아직 깜박이고 정거장에 우두커니 서 있는 눈물들 아 사랑들 지붕을 넘어 하늘의 계단을 지나 언덕들 숨어 있던 계곡들이 일제히 접혔다 퍼지며 붕붕 연주하는 저 세월의 아코디언 소리들
인생의 노래가 쓸쓸한 것은 과거가 흘러간 것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살면서 나를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골목을 돌아설 때 불쑥 튀어나오는 낯익은 바람처럼 햇빛 아래를 걷다가 울컥 쏟아지는 고독의 멘스처럼.
시집 - 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때 (200년, 문학동네)
권대웅 시인 / 맨드라미에 부침
언제나 지쳐서 돌아오면 가을이었다. 세상은 여름 내내 나를 물에 빠뜨리다가 그냥 아무 정거장에나 툭 던져놓고 저 혼자 훌쩍 떠나버리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고개를 들고 바라보면 나를 보고 빨갛게 웃던 맨드라미 그래 그런 사람 하나 만나고 싶었다. 단지 붉은 잇몸 미소만으로도 다 안다는 그 침묵의 그늘 아래 며칠쯤 푹 잠들고 싶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쓸며 일어서는 길에 빈혈이 일 만큼 파란 하늘은 너무 멀리 있고 세월은 그냥 흘러가기만 하는 것 같아서 싫었다. 그 변방의 길 휘어진 저쪽 물끄러미 바라보면 오랜 여행에서 돌아와 문을 여는 텅 빈 방처럼 후드득 묻어나는 낯설고도 익숙한 고독에 울컥 눈물나는 가을
덥수룩한 웃음을 지닌 산도적 같은 사내가 되고 싶었습니다. 혹시 서 있다가 아름답도록 아픈 사람을 만나면 불러주십시오.
시집 - 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때 (문학동네)
권대웅 시인 / 담장이 넝쿨
김과장이 담벼락에 붙어있다 이부장도 담벼락에 붙어있다 서상무도 권이사도 박대리도 한주임도 모두 담벼락에 붙어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밀리지 않으려고 납작 엎드려 사력을 다해 견뎌내는 저 손 때로 바람채찍이 손등을 때려도 무릎팍 가슴팍 깨져도 맨손으로 암벽을 타듯이 엉키고 밀어내고 파고들며 올라가는 저 생존력
모두가 그렇게 붙어 있는 것이다 이 건물 저 건물 이 빌딩 저 빌딩 수많은 담벼락에 빽빽하게 붙어 눈물나게 발악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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