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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대웅 시인 / 세월의 갈피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9.

권대웅 시인 / 세월의 갈피

 

 

오래된 장롱을 열었을 때처럼

살다보면 세월에서 문득

나프탈렌 냄새가 날 때가 있다

어딘가에 마무리하지 못하고 온 사랑이

두고 온 마음이

쿡, 코를 찌를 때가 있다

 

썩어 없어지지 못한 삶이

또 다른 시간으로 자라는 저 세월의 갈피

 

들판에는 내가 켜놓은 등불이 아직 깜박이고

정거장에 우두커니 서 있는 눈물들

아 사랑들

지붕을 넘어 하늘의 계단을 지나 언덕들

숨어 있던 계곡들이

일제히 접혔다 퍼지며

붕붕 연주하는 저 세월의 아코디언 소리들

 

인생의 노래가 쓸쓸한 것은

과거가 흘러간 것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살면서 나를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골목을 돌아설 때 불쑥 튀어나오는

낯익은 바람처럼

햇빛 아래를 걷다가 울컥 쏟아지는

고독의 멘스처럼.

 

시집 - 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때 (200년, 문학동네)

 

 


 

 

권대웅 시인 / 맨드라미에 부침

 

 

언제나 지쳐서 돌아오면 가을이었다.

세상은 여름 내내 나를 물에 빠뜨리다가

그냥 아무 정거장에나 툭 던져놓고

저 혼자 훌쩍 떠나버리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고개를 들고 바라보면

나를 보고 빨갛게 웃던 맨드라미

그래 그런 사람 하나 만나고 싶었다.

단지 붉은 잇몸 미소만으로도 다 안다는

그 침묵의 그늘 아래

며칠쯤 푹 잠들고 싶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쓸며 일어서는 길에

빈혈이 일 만큼 파란 하늘은 너무 멀리 있고

세월은 그냥 흘러가기만 하는 것 같아서 싫었다.

그 변방의 길 휘어진 저쪽 물끄러미 바라보면

오랜 여행에서 돌아와 문을 여는 텅 빈 방처럼

후드득 묻어나는 낯설고도 익숙한 고독에

울컥 눈물나는 가을

 

덥수룩한 웃음을 지닌 산도적 같은 사내가 되고 싶었습니다.

혹시 서 있다가 아름답도록 아픈 사람을 만나면 불러주십시오.

 

시집 - 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때 (문학동네)

 

 


 

 

권대웅 시인 / 담장이 넝쿨

 

 

김과장이 담벼락에 붙어있다

이부장도 담벼락에 붙어있다

서상무도 권이사도 박대리도 한주임도

모두 담벼락에 붙어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밀리지 않으려고

납작 엎드려 사력을 다해

견뎌내는 저 손

때로 바람채찍이 손등을 때려도

무릎팍 가슴팍 깨져도

맨손으로 암벽을 타듯이

엉키고 밀어내고 파고들며

올라가는 저 생존력

 

모두가 그렇게 붙어 있는 것이다

이 건물 저 건물

이 빌딩 저 빌딩

수많은 담벼락에 빽빽하게 붙어

눈물나게

발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권대웅 시인

1962년 서울 출생.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당나귀의 꿈>(민음사/1993). <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때>(문학동네/2003). 장편동화 『돼지저금통 속의 부처님』 『마리이야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