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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동호 시인 / 과녁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9.

이동호 시인 / 과녁

—러시안룰렛

 

 

거리를 걷고 있었다

나무들이 붉게 달아오른 잎사귀를 장전하고 있었다

나무들이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나뭇잎은 천천히 허공을 회전하면서 빠져 나오다가 청춘 남녀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나무 아래 과녁이 된 사람들이 서로의 품속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나도 어딘가로 쓰러지고 싶었지만 나를 받아낼 품이 없었으므로

죽고 싶은 가을이었다

 

육교 중앙에 한참을 멈춰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육교 아래 끊임없이 자동차가 장전되고 있었다

울적했으므로 나를 육교 아래로 당기고 싶었지만 나는 누군가 쓰다버린 탄피였다

나는 여기저기 버려져 있었다

뒹구는 낙엽들이 내가 쓰다버린 편지지 같아서 이 울화는,

아무리 쏘아대도 잘 해소되지 않는 것이다

 

소주병은 왜 던지기에 알맞은 손잡이를 가졌을까

나는 왜 비틀기 쉬운 가는 목을 가졌을까

소주를 깠다 내 속에 털어 넣고 나면 수시로 터지는 감정들이다

세상을 터뜨릴 듯 고함을 질렀지만,

터지는 것은 내 몸뿐이었다

 

택시를 탔다 총알택시였다 아, 나는 총알탄 사나이였다

나의 표적은 사랑이 아니다 나는 곧,

집에 가 박힐 것이다

 

 


 

 

이동호 시인 / 공룡발자국화석

 

 

수수 억 년 동안

한 자리에 찍힌 육중한 저 발자국을 보고

그저 발자국 정도로만 말하는 것은

큰 실례다

발자국이라고 하기에는 발자국 주인보다도

이제 진흙조차 단단한 반석이 되어

발자국을 모시고 있다

땅 위의 무수한 존재들이 생멸을 거듭하는 동안

진화의 모든 것을 주관하였다는 듯

지구를 한 켤레 신발로 벗어둔 그의

나머지 발자국들은 지금쯤 쿵쿵 중생대 어디쯤에서

막 뛰어오고 있는 중이다

하늘에 떠 있는 해 또한 그의 숨구멍이다

급하게 몰아쉬는 숨소리처럼 구름 몰려들었다 흩어지고

수수 억 년이란 겨우 한 호흡이라는 듯

발자국을 신은 허공이 거대한 몸집을 드러내고 있다

중생대가 현대 어디쯤 도달해 있는지

산이 저수지를 발자국으로 찍어놓고

내 옆에 웅크리고 있다

 

 


 

이동호 시인

1966년 경북 김천 출생. 대구대 대학원 국어국문락과 졸업. 성균관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졸업. 제6회 <시산맥상> 대상 수상. 2004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2008년〈부산일보〉 동시 당선. 시집 <조용한 가족> <총잡이>. 난시동인, 다시동인. 현재 신라중학교 국어교사로 재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