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미 시인 / 우리 사이
케이크는 소금과 설탕을 쳐서 만든다 국은 소금만 넣어 끓인다 찌개는 고추장 고춧가루 다 넣어 끓인다 밥은 아무것도 넣지 않고 짓는다 감칠맛을 돋우는 간에 대해 생각한다 가락국수에 고춧가루를 뿌려 먹는 사람은 다 같이 고춧가루를 뿌려 먹자고 권유한다 웃으며 우긴다 고춧가루 없이 무슨 맛으로 먹냐고 시비를 건다 서로 간을 보다가 빈 그릇을 만난다 빈 그릇은 이제 서로 헤어질 시간이라고 명령한다 우리는 헤어지면서 정이 든다 우리 사이엔 많아도 적어도 불편한 것이 있다 그 불편함이 없으면 우리 사이가 아니다 그들이 우리가 될 때 한 냄비 속으로 들어온다 우리는 비슷한 맛이 될 테지만 끝까지 서로를 알아본다 차이가 우정을 깊게 만들지 깊은 것은 무서워 빠져들기 때문이야 차이를 없애려고 눈썹에 똑같은 문신을 한 여자들이 쏟아져 나오는 거리 오늘도 남자들은 비슷한 이유로 각자 사랑에 빠진다
김종미 시인 / 쿠사마 야요이 면회하기
그녀는 내가 아는 유일한 외계인이다. 가끔 빈 맥주 캔을 구기며 구겨진 그 공간에 외계가 있는 것 같기도 해서 나는 자주 그녀를 방문한다. 그녀는 눈동자 없는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나는 흰자위 없는 눈으로 그녀를 훔쳐본다.
훔쳐보는 떨림, 악보가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불발이 뻔한 시한폭탄의 초침이 돌아간다. 뻗을 게 뻔한데 폭탄주를 마구 돌리는 기분. 깨진 보석은 서로 속고 속이면서 반짝인다. 당신은 사기꾼입니까?
너무 눈이 부셔 검은 날개들이 떠도는 시야. 발을 헛디디는 쾌락. 나를 어지럽게 만드는 축복.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내 목에 목줄을 채우는 그녀. 나는 무력해진 두 손을 버리고 앞발을 들어 올린다. 한 자리에서 맴돈 길이 얼마나 멀리 뻗었는지 별자리 같다.
떨어진 빗방울은 다시 승천하여 그녀의 물방울이 되고 퍼져 앉은 노란 호박의 패션이 된다. 링거 수액이 흐르는 줄처럼 좁고 좁은 병동으로 방울방울 떨어지듯 걸어 들어가면
한없이 팽창하거나 한없이 수축하는 물질이 느껴진다. 일시에 타오르거나 얼어붙는 냄새가 난다. 붉은 가발을 덮어쓴 그녀가 노란 물감을 내게 바른다. 주문은 반복될수록 아름다워져서 물결처럼 처녀의 몸이 돌아온다.
노란색은 얼마나 많은 노란색을 함축하는가. 석양을 마주하고 나는 호박처럼 정성껏 앉아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간이 흐른다는 게 사실일까. ‘곧 끝나리’라고 기대하는 나에게 그녀는결코 ‘얼마남지않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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