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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계원 시인 / 담쟁이넝쿨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9.

정계원 시인 / 담쟁이넝쿨

 

 

 너는 맨 주먹뿐이다

 담장 밑에서 겨우 움막치고 사는 줄로 알았는데,

 

 생을 비단보자기에 싸보려고 발톱이 빠지도록 담벼락을 기어오르고 공사장에서 막소주로 하루를 접는날도 있었다 허기의 폭풍에 뿌리가 뽑히지 않으려고 이마에 걸려있는 게으름을 잘라낸다 잎새들이 명품운동화를 사달라는 몸짓의 신호를 보내올 때 서러운 운명의 리어카를 끌며 신음했다 그럴수록 어금니를 깨물며 매서운 열기가 내려앉은 한낮, 8월의 태양에 정수리를 태우며 온몸에 돈꽃의 반점을 피워 냈다 냉골의 아랫목에 기어이 봄이 오고, 일벌들이 가끔 찾아와 탁주 한 잔을 주고받으며 땀을 식히기도 했다

 

 장미의 입술이 화려한 오월,

 너는 가파른 담벼락을 이미 점령하고 있었다

웹진 『시인광장』 2022년 10월호 발표

 

 


 

정계원 시인

가톨릭관동대학교 <현대시창작과정>을 수료. ​2007년 《시와세계》 시로 등단. 시집으로 『접시위에 여자』 『밀랍물고기』 『내 메일함에 너를 저장해』가 있음. 한국문학관협회 공로상, 제27회 영랑문학상 본상 수상. 현재 강릉문인협회사무국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