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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희근 시인 / 디딜방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10.

강희근 시인 / 디딜방아

 

 

질쿵질쿵 디딜방아 운다

디딜방아 찧다가

삐쳐 달아나는 파편에 엉뎅이 한 짝

내어주고 숨겨둔

곱디 고운 임실이 그리워 디딜방아 운다

고추방아 찧다가

매운 고추 세상 이제 겨우 젖으려는

남편 하나 하늘 받치던 손 놓아 버린

임씨 가문 새댁이 그리워 디딜방아 운다

울 일이 묘 포기처럼 수많은 세월

임실이 그리움 하나

골라 눈썹 둘 아아라히 그리며 질쿵

귓볼 도도롬히 새기며 질쿵 디딜방아 운다

 

-시집 『화계리 (1994)

 

 


 

 

강희근 시인 / 바다, 한 시간쯤

 

 

바다,

바다를 바라보고 한 시간쯤 있으면

바다가 장판지 색깔이 된다

군불 연기 한 바닥 돌고 난 뒤

장판지 색깔로 가득 차 있을 것인데

애인이 곁에 있으면

애인의 얼굴도 군불 연기에 거들고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바다라 하면 꼭 돛단배를 띄우거나

멀리 섬 근처에다 이루어지지 않는

꿈 하나씩 매달아 놓고 보는데

하기사 꿈이 무슨 초인이 되어 말굽소리 만들어

주기라도 한다면

가도 가도 끝없는 수평선의 내의 한 벌

다가오는 구정 선물로 포장지에 싸일 수만

있다면

매달아 놓은 꿈 자린고비로 짭짤하다

할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처럼 바다

바다가 장판지 색깔이 되고 요즘 흘러 다니는 한류 같은

따뜻한 손이 되고 보면

바다는 이제 꿈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

병아리 털 같은 부드러움이거나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겨울나기의 손등이 튼 애인의

젖두덩 젖어오는 가슴이리라

젖어오는 시간이리라

 

-시집 『바다. 한 시간쯤』(2006)

 

 


 

강희근(姜熙根) 시인

1943년 경남 산청에서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동아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 등단. 시집으로 『연기 및 일기』 『풍경보』 『산에 가서』 『사랑제』 『사랑제 이후』 『화계리』 『소문리를 지나며』 『 중산리 요즘』 등이 있음. 국립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장·인문대학장, 경남문인협회 회장을 역임. 현재 경상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동국문학상, 시예술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