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시인 / 디딜방아
질쿵질쿵 디딜방아 운다 디딜방아 찧다가 삐쳐 달아나는 파편에 엉뎅이 한 짝 내어주고 숨겨둔 곱디 고운 임실이 그리워 디딜방아 운다 고추방아 찧다가 매운 고추 세상 이제 겨우 젖으려는 남편 하나 하늘 받치던 손 놓아 버린 임씨 가문 새댁이 그리워 디딜방아 운다 울 일이 묘 포기처럼 수많은 세월 임실이 그리움 하나 골라 눈썹 둘 아아라히 그리며 질쿵 귓볼 도도롬히 새기며 질쿵 디딜방아 운다
-시집 『화계리 (1994)
강희근 시인 / 바다, 한 시간쯤
바다, 바다를 바라보고 한 시간쯤 있으면 바다가 장판지 색깔이 된다 군불 연기 한 바닥 돌고 난 뒤 장판지 색깔로 가득 차 있을 것인데 애인이 곁에 있으면 애인의 얼굴도 군불 연기에 거들고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바다라 하면 꼭 돛단배를 띄우거나 멀리 섬 근처에다 이루어지지 않는 꿈 하나씩 매달아 놓고 보는데 하기사 꿈이 무슨 초인이 되어 말굽소리 만들어 주기라도 한다면 가도 가도 끝없는 수평선의 내의 한 벌 다가오는 구정 선물로 포장지에 싸일 수만 있다면 매달아 놓은 꿈 자린고비로 짭짤하다 할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처럼 바다 바다가 장판지 색깔이 되고 요즘 흘러 다니는 한류 같은 따뜻한 손이 되고 보면 바다는 이제 꿈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 병아리 털 같은 부드러움이거나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겨울나기의 손등이 튼 애인의 젖두덩 젖어오는 가슴이리라 젖어오는 시간이리라
-시집 『바다. 한 시간쯤』(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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