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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정국 시인 / 청동 흉상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10.

오정국 시인 / 청동 흉상

 

 

새벽의 고요가 광목천을 감싸고 있다

희뿌연 휘장에 둘러싸인 형상은

아직 잠을 깨기 전이어서

누구도 섣불리 손댈 수가 없다

 

눈을 부릅뜨고 있거나

찡그린 미간이거나, 목에 얹힌 얼굴이

두렵기만 하다 깊고 어두운 창고 같고

박물관 지하의 수장고 같은데, 새벽은

오후 2시의 제막식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저의 숨결은커녕 죽음조차 느낄 수 없는

데스마스크, 얼굴 표정 하나로

일생을 요약하고 있다

안면 근육의 무수한 균열을 입에 문 채

이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정말 그러하다는 듯이

 

 


 

 

오정국 시인 / 진흙을 빠져나오는 진흙처럼

 

 

 매미가 허물을 벗는, 점액질의 시간을 빠져나오는, 서서히 몸 하나를 버리고, 몸 하나를 얻는, 살갗이 찢어지고 벗겨지는 순간, 그 날개에 번갯불의 섬광이 새겨지고, 개망초의 꽃무늬가 내려앉고, 생살 긁히듯 뜯기듯, 끈끈하고 미끄럽게, 몸이 몸을 뚫고나와, 몸 하나를 지우고 몸 하나를 살려내는, 발소리도 죽이고 숨소리도 죽이는, 여기에 고요히 내 숨결을 얹어보는, 난생처음 두 눈 뜨고, 진흙을 빠져나오는 진흙처럼

 

 


 

오정국 시인

1956년 경북 영양 출생. 198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 『저녁이면 블랙홀 속으로』 『모래무덤』 『내가 밀어낸 물결』 『멀리서 오는 것들』 『파묻힌 얼굴』 『눈먼 자의 동쪽』과 시론집『현대시 창작시론-보들레르에서 네루다까지』, 『야생의 시학』 등 출간.  제12회 지훈문학상, 제7회 이형기문학상 수상. 현재 한서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